봉준호 감독이 지난 4월 22일 오전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영화 '기생충' 제작보고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이 지난 25일(현지시간) 한국 영화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가운데, 제작환경에 대해 언급한 봉 감독의 과거 인터뷰가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전문매체 ‘씨네21’은 지난달 11일 봉 감독과의 인터뷰를 보도하면서 표준계약서 도입 이후 변화한 영화제작환경에 대해 질문했다. 봉 감독은 표준근로기준법에 따른 영화 제작 경험에 대해 “아주 좋더라. 나이 들면서 체력이 저하돼서 표준근로계약이 아니면 어땠을까 싶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생충’ 제작비는 약 150억원 수준으로 알려져있다. 이번 칸 영화제 경쟁작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1억 달러(약 1200억원)나 봉 감독의 전작인 ‘옥자’의 5000만 달러(약 600억원)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지만, 블록버스터가 아닌 국내 영화에게 150억원은 적지 않은 액수다. 국내에서 이 정도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은 ‘명량’, ‘대호’ 등 블록버스터급 대작 영화들이다.

결국 영화제작에 참여한 근로자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기생충’과 같은 규모의 영화에도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이 요구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봉 감독은 표준근로계약에 따른 제작비 상승에 대해 “좋은 의미의 상승이라고 본다”며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봉 감독은 “내가 고용관계에서 이들에게 갑은 아니지만, 이들의 노동을 이끌고 예술적인 위치에서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나의 예술적 판단으로 근로시간과 일의 강도가 세지는 것이 항상 부담이었다”고 설명했다. 봉 감독은 “연출부 막내에게 슬쩍 급여를 물어보기도 했는데, 이제는 미국이나 일본 스탭에 뒤지지 않더라”며 “이제야 ‘정상화’돼 간다는 생각이다”라고 덧붙였다.

봉 감독은 또한 표준근로계약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영화제작일정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봉 감독은 “‘설국열차’와 ‘옥자’를 거치면서 미국식 조합 규정에 따라 찍는 걸 체득했다”며 “지난 8년간 트레이닝되어 이번에 표준근로 계약에 맞춰서 하는 게 문제없고 편하더라. ‘기생충’도 후반부 눈 오는 장면을 포함해 77회차에 끝냈다. 예정된 스케줄에 오차 없이 마쳤다”고 설명했다.

표준근로계약을 준수하면서도 촬영일정을 지켜 불필요한 제작비 지출을 줄인 데는 영화제작 전 촬영일정을 세밀하게 준비하는 봉 감독의 성격도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국열차’에서 봉 감독과 함께 작업한 배우 크리스 에반스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봉 감독에 대해 “집을 지으면서 못 한 포대를 사는 것이 아니라 ’못 53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며 “봉 감독의 촬영방식은 독보적이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봉 감독은 지난 17일 영국의 영화전문매체 ’스크린 인터내셔널‘과의 인터뷰에서도 영화제작 환경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봉 감독은 “집안에서 대화하는 배우 이선균과 집 밖에서 노는 아이의 모습을 한 장면에 찍어야 했다"며 "창문 너머 아이가 노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야 했는데, 당시 한국에는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어서 아역 배우에게 무리였다. 너무 위험한 일이라 판단해 결국 블루스크린을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블루스크린을 이용할 경우 추가 촬영 및 CG합성 등이 필요해 제작비가 추가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봉 감독은 “비용이 조금 더 들었지만 아역을 보호하기 위한 가치있는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영화 '기생충' 불어판 포스터. <사진=뉴시스>

국내 영화산업에 표준근로계약서가 도입된 것은 지난 2011년. 김익상 서일대학교 교수는 2015년 발표한 ‘표준근로계약서 도입 후 영화제작 현장의 근로 환경 변화에 관한 연구’에서 “표준계약서 이전의 영화현장에는 명시적인 휴게시간의 개념이 없었다. 평균 40~50회 차 촬영을 기준으로 짧게는 3~4일, 길게는 8~9일을 연속해서 촬영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일일 근로시간이 18시간을 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열악한 영화제작환경을 설명하고 있다.

적은 급여조차 불투명하게 지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한 영화제작자는 “예전에는 퍼스트(영화 파트별 최상급 스태프)가 팀들을 대표해서 한 작품에 얼마를 받아서 자기 밑에 조수들에게 자기가 알아서 나눠주는 형태였다. 사실 퍼스트가 3천만 원을 받아서 자기가 2천만 원을 갖고 조수들에게 천만 원을 나눠줘도 조수들은 할 말이 없다”며 당시의 제작현장을 회고했다. 이 제작자는 “제작사 입장에서도 그 밑에 조수들이 얼마를 받는지는 관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팀별계약이었고, 그 팀원을 구성하고 고용하는 책임은 다 퍼스트에게 있었기 때문”이라며 “밑으로 갈수록, 막내가 될수록 근로조건 등이 열악했다”고 밝혔다.

표준계약서가 도입된 이후에도 영화·드라마 등 컨텐츠제작현장에서 근로자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경우는 흔히 발견된다. 지난해 1월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의 미술스태프 고모씨가 숨져 제작현장의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전국영화산업노조는 “이번 사고는 근로기준법 제59조 근로시간 특례업종에 대한 관리감독이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은 것을 여실히 보여준 인재”라며 고씨의 죽음이 과로사라고 주장했다.

실제 2016년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영화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월 평균 근로시간이 300.7 시간으로 OECD 평균 146시간, 한국 평균 172시간 보다 두 배 가량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반면 영화스태프들의 연 평균소득은 1970만원(월 164만원)으로 같은해 임금근로자 평균 소득(3387만원)의 60%에도 미치지 못했다.

표준근로계약서 도입 이후에도 영화제작환경은 장시간노동과 저임금이라는 악조건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블록버스터급 상업영화가 아닌 작품에 150억원의 제작비가 쓰인 이유에 대해 “이게 정상이다”라고 답한 봉 감독의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생충’은 국내 영화계에 표준근로계약을 준수하면서도 세계에서 인정받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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