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저희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감염과 확산을 막지 못해 국민 여러분께 너무 큰 고통과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지금까지도 ‘사과의 정석’으로 불리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2015년 메르스 사태 대국민사과문의 첫 문장이다. 당시 삼성서울병원에 메르스 확산의 책임을 물으며 맹렬한 비난을 퍼붇던 여론의 분노는 진정성있는 사과문 발표 이후 상당히 가라앉았다. 경영권 승계문제 등으로 이 부회장에게 비판적이었던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조차 이 사과문만큼은 흠잡을 곳이 없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SK디스커버리(구 SK케미칼) 최창원 부회장의 처신은 이재용 부회장과 전혀 다르다. 왜 그럴까. 

지난 2011년 불거진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메르스 사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이하 가습기넷)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신청 접수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총 6210명이며, 이중 사망자는 무려 1359명에 달한다.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만 집계해도 총 810명, 가습기 살균제 생산업체의 자금으로 구성된 특별구제계정(3~4단계 피해자)으로부터 지원받는 피해자는 2750명이다.

수천명의 피해자와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정작 문제가 된 가습기살균제 원료 제조업체인 SK 케미칼은 아직까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SK케미칼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최창원 SK 디스커버리 부회장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입장표명을 했다는 소식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촌인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달리 대중이나 언론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최 부회장의 성격 상 앞으로도 사과의 말을 듣기는 어려워보인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이미 최 부회장을 이번 사태의 책임자로 고발 조치한 상황이다. 가습기넷은 지난해 11월 SK케미칼 및 애경산업의 전현직 임원들을 고발하면서 최 부회장의 이름을 피고발인 명단에 포함시켰다. 당시 가습기넷은 고발 사실을 발표하며 “이들 가해기업들은 이 순간에도 자신들로 인한 피해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SK케미칼에 대해서는 “일부 특정 피해자들만 골라 비공식 배상을 제안하는 등 입막음에 급급하는 모습으로 일관해 공분을 사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SK 케미칼은 정부가 인정한 ‘가습기 메이트’ 단독사용 피해자(1∼2단계) 10명을 대상으로 한 지원 방안을 논의 중이다. 일부 피해자와는 치료비 지원과 관련된 협의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대책 발표없이 일부 피해자와 비공식 협의를 이어나가는 SK케미칼의 행태에 ‘꼬리자르기’ 시도라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전현직 임원들이 증거인멸 및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되는 상황에서 급하게 사태 수습에 나서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가습기넷은 지난달 7일 옥시레킷벤키저에서 집회를 열고 “가습기 살균제 원료 물질을 만들어 판매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등도 가해자”라며 “두 기업은 검찰 수사와 형사 처벌에 상관없이 모든 피해자에게 제대로 배상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계속 메아리치고 있지만 최 부회장의 답변은 아직 들리지 않고 있다.

지난 23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아내와 두 자녀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며칠 전부터 첫째가 아파서 병원에도 다녀왔지만 증세가 안좋아져서 어제는 밤새 기침하느라 한숨도 못잤다"며 "그런데도 일어나서 공부한다고 한다. 폐에서 나는 기침소리가 오랜 경험으로도 좋지 않은데 공부한다고 하니 눈물도 나고 마음도 무겁고 힘들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전했다. 자녀를 위해 가습기 살균제를 구매했던 많은 부모들은 이처럼 여전히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단순히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까지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25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조덕진(49)씨가 폐 조직이 굳어 호흡장애를 초래하는 폐섬유증으로 사망했다. 가해 업체와 최고책임자들의 사과의 말 한마디를 듣지 못한 채 사망한 피해자는 이로써 1403명으로 늘었다. 최창원 부회장은 1403명의 사망자 수를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는 것이 기업인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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