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일러스트AC

1960년 어느 신문사가 자신의 사옥이 있던 태평로에 한 극장을 연다. 그 극장은 당시의 다른 극장들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분위기로 인해 많은 젊은이들이 찾았고 그런 관객들의 입맛에 맞춰 1964년 ‘어느 영화’ 한 편이 개봉되는데 그 영화는 개봉 첫 날부터 수많은 관객이 몰려들어 그 극장에서부터 덕수궁까지 길게 줄이 이어지며 단숨에 23만 명이라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흥행 1위 영화로 등극한다. 이 극장은 지금은 없어진 아카데미 극장이다.

트로트가 대세를 이루던 1960년대 한국영화 음악. 그 시기에 전주와 간주가 할리우드 갱 영화를 연상시키는 재즈 분위기의 색소폰 선율이 금속 질감의 비트에 맞추어 연주되며 어둡고 향락적인 재즈와 블루스 등이 가미된 다소 복잡하고 풍성한 느낌의 스탠더드 팝 음악 하나가 ‘어느 영화’의 주제가로 쓰인다. 우리나라에서 재즈를 영화음악으로 사용한 것은 처음이며 이 영화음악을 부른 가수는 새로운 대중음악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된다.

‘어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두 개의 장례 행렬이 묘사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두 개의 장례 행렬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데 한 구의 시신은 고급 세단으로 운구가 되지만 다른 한 구의 시신은 낡은 손수레에 실려 운구 된다. 이 마지막 장면은 빈부격차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1960년대 당시의 서슬 퍼런 검열관에 의해 삭제 당할 뻔하지만 앞서 언급한 이 영화 개봉관의 소유자이자 사장이 대통령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이 영화를 본 대통령이 문제없다고 허락을 하여 상영이 가능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난해 2017년, 70여 편의 영화를 연출한, 1960년대를 대표하는 흥행 감독이자 한국 장르 영화의 개척자가 폐암을 진단받고 투병하다가 별세를 한다. 그 감독은 원래 배우를 꿈꿨고 영화에 출연 제의까지 받았지만 키가 조금 작다는 이유로 결국 거절을 당하고, 대신 연출부에서 영화 일을 시작해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 영화는 물론 우리나라 괴수 영화의 효시 작품을 연출하고 마침내 ‘어느 영화’를 계기로 우리나라 영화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1959년 충무로의 한 유명 영화사에서 오디션이 열린다. 5098대 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그 영화사의 사장이자 감독의 눈에 띄어 ‘나하고 3년 고생할래?’란 물음과 함께 전속 계약을 맺게 된 사람은 원래 판검사를 꿈꾸던 모범생으로 집안의 가세가 기운 후 호떡 장사까지 하기도 했던 남루한 행색의 한 청년이었다.

그 남루한 행색의 한 청년이 바로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한국 영화의 큰 별인 배우 신성일이다. 이 예명은 ‘뉴 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으로 그를 발탁한 신상옥 감독이 지어주었으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를 영화계의 스타로 만든 ‘어느 영화’의 김기덕 감독과 같은 병으로 우리의 추억 속으로 영면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스타 시스템이 가동한 ‘어느 영화’가 바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1960년대 청춘영화의 정점인 명작 ‘맨발의 청춘’이다. 그가 남긴 영화계의 족적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기에 그만큼 안타까움은 금할 수 없다. 흔히 유명 영화배우가 하늘나라로 가면 ‘진정 영화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라는 수식어를 붙이고는 한다. 평균 기대 수명이 80세를 넘는 지금 같은 장수 시대에 81년 길이의 어찌 보면 짧은 장편 영화를 끝으로 그를 ‘별들의 고향’으로 떠나보내게 되었다. 우리나라 영화계의 역사이자 신화인 고인이 별이 빛나는 하늘나라에서 영화처럼 멋지고 행복한 삶을 영원히 사시기를 기원하며 고인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두 손 모아 빌어 본다.

 

(필자 소개)

한국을 대표하는 공포 미스터리 작가다. 이십대에 유니텔 등 각 PC통신사로부터 최고의 공포 미스터리 판타지 작가로 선정됐으며, 뉴시스에 공포 미스터리 소설 ‘악령의 추종자’를 연재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하고 연극과 영화 보기를 즐겨했으며 현재는 작가 겸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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