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국방백서'에서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문구가 명시된 부분. <자료=국방부>

[이코리아] 국방부가 올해 12월 발간 예정인 ‘2018 국방백서’에서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문구를 삭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비핵화논의 진전에 따른 외교적 조치로 보이지만, 보수층에서는 시기상조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 ‘북한=적’, 시작은 김영삼 정권

유승민 바른미래당 전 공동대표는 지난 2017년 대선 당시 한 토론회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후보의 안보관을 공략하며 “국방백서에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돼 있는데, 통수권자가 주적이라고 못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인식과 달리 국방백서에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문구가 명시적으로 포함된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박정희 전 정권 시절인 1967년 최초 발간된 국방백서는 1968년 이후 한동안 정간됐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8년부터 다시 발간되기 시작했다. 냉전이 종식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대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출간된 ‘1988 국방백서’는 군의 국방목표를 “적의 무력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한다”로 규정했다. 북한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익명으로 처리한 것. 이후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한반도 정세가 완화되면서 1994년 국방백서에는 ‘적’이라는 단어가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이라는 보다 온건한 표현으로 대체됐다.

실제로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문구가 국방백서에 삽입된 것은 김영삼 전 정권 중반인 1995년이다. 1994년 남북 판문점 회담에서 북한 박영수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대북 여론이 악화되고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1995~1996년 국방백서에서 처음으로 “북한을 주적으로 상정하면서”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김대중 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국방백서에 북한을 주적으로 표현한 문구는 거듭 사용됐지만,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개선되면서 해당 표현이 문제가 됐다. 이후 2003년까지 국방백서가 나오지 않다가 2004년 노무현 전 정부가 ‘주적’ 표현을 “북한의 직접적 군사위협”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한 국방백서를 4년 만에 다시 출간했다.

북한을 적이라고 다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 2010년부터다. 이명박 전 정부는 2010년 국방백서에서 ‘주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위협이 지속되는 한, 그 수행 주체인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문구를 명시했다. 이 표현은 이후 2012·2014·2016년 발간된 국방백서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현재 국방부가 삭제 검토를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구다.

◇ 국방백서는 대외문서, ‘적’ 보다는 ‘위협’이 적절한 표현

과거 사례를 살펴봐도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문구가 국방백서에 들어가느냐는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됐다. 대북관계가 개선될 경우에는 ‘적’이라는 표현을 ‘위협’으로 대체한 반면, 관계가 다시 경색될 경우 ‘적’이라는 표현이 재등장했다.

현재 국방부가 국방백서에서 ‘북한=적’이라는 문구 삭제를 검토하는 것 또한 비핵화 논의 진전과 남북관계 개선에 발맞추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정부가 공식으로 발간한 대외문서에서 적으로 규정한 상대와 평화적 대화를 지속한다는 것은 모순되기 때문.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23일 연합뉴스TV ‘뉴스포커스’에 출연해 “과거 진보정권과 비교해봐도 지금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더욱 진전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며 “‘북한은 주적’이라는 개념을 지우는 것도 일시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한 대외문서에서 특정 세력에 대해 ‘적’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국가가 없다는 점도 검토 이유 중 하나다. 독일·미국 등 해외에서는 주로 위협(threat)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김 교수와 함께 이날 ‘뉴스포커스’에 출연한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이날 “국방백서는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의 일환이다. 다른 나라에 우리가 투명하게 군사력을 운용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며 “그런 본질을 볼 때 '적'이나 '주적'은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 한국당, 보수언론 “국방백서 검토는 시기상조”

하지만 자유한국당 등 야권과 보수언론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어, 남북관계 개선 등의 정세 변화에도 불구하고 국방백서 문제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자유한국당은 22일 윤영석 수석대변인, 정양석 외교통일위원회 간사, 백승주 국방위원화 간사 공동명의의 논평을 통해 “대한민국 국가안전보장을 위협하는 국방부를 규탄한다”며 항의의 뜻을 전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는 국방백서에서 북한군을 '적'으로 표기하는 대신 '군사적 위협'으로 대체하는 이유가 4·27 판문점 선언 후속 조치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며 “문 대통령과 송영무 국방장관은 대한민국 국군을 정치적 포퓰리즘의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대한민국 국군은 '그들의 국군'이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성향의 일간지도 23일 일제히 사설을 내고 정부와 국방부를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적대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현실에서 엄연히 적대 상태가 존재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며 “북에선 여전히 우리 국군이 적인데 우리는 북한군이 적이 아니라고 한다면 안보가 어떻게 되나. 일선 장병들이 정신분열증을 느끼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또한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문구의 삭제 여부를 성급하게 결정해서는 안된다고 성토했다.

국방백서 검토에 앞서 북한의 협조가 우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신 센터장은 “북한이 (9월) 정상회담 등에서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등에 대해) 유감 표명을 해주거나 비핵화 조치를 한다면 쉽게 갈 수 있는 문제”라며 “9월 정상회담과 비핵화 진행에 따라 자연스럽게 풀어갈 문제다. (국방백서 내용을) 갑작스럽게 바꾸는 것은 정책전환의 정당성 측면에서는 취약하지 않나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