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사가 지난해 3월 작성한 비상계엄 선포문.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국방부가 기무사에서 작성한 67페이지 분량의 계엄 문건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문건에서 기무사는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지칭하는 등 편향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한 과거 12·12를 연상케 하는 구체적인 계엄 절차도 상세히 서술돼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기무사는 해당 문건에서 과거 위수령·계엄 선포 사례를 설명하면서 제주 4·3 사건을 제주폭동으로, 부마민주항쟁을 부마사태, 또는 부산소요사태 등으로 표현했다. 폭동, 사태 등의 표현은 국가 폭력에 의한 가해 사례나 민주화운동 등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기무사는 이 밖에도 4·19 혁명은 4·19 학생의거로, 6.3 한일협상 반대운동은 6.3사태 등으로 표기했다. 해당 사건들의 공식적인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폭동, 사태 등으로 낮춰 부른 것은 기무사의 권위주의적인 역사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 밖에도 해당 문건의 세부 내용은 12·12 군사반란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구체적인 세부 절차가 포함돼있어 기무사의 문건 작성 취지에 의구심이 더해지고 있다. 군인권센터는 24일 서울 마포구 이한열기념관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기무사가 '비상계엄 시에도 합동수사본부가 민간인 수사를 하거나 계엄사가 정부를 장악할 수 있다'는 자의적 법령해석을 했다"며 군이 계엄주체가 되어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합동수사본부는 현행법 상 비상계엄 시 반드시 설치되는 기관이 아니다. 군 검찰 출신 김정민 변호사는 “이번 문건은 합수부를 주도기관으로 상정하고, 9명의 검열단을 운영해 언론대책반을 운영, 언론을 통제하려고 했다”며 “현행법에도 없는 초법권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또한 해당 문건에 따르면 합수부의 민간인 수사권을 확대하고, 수사3국을 경찰청 홍제동 수사분실에 배치해 민간인 수사를 담당하게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홍제동 수사분실은 군사정권 시절 고문이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의 후신이다.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은 “서울시내 경찰서가 그렇게 많음에도 왜 홍제동 대공분실을 수사 기구로 설치해놨는지 매우 의심스럽다”며 “반정부인사 또는 탄핵 기각에 불응하는 시민들을 고문이나 기타 가혹행위를 통해 제압하기 위한 불법적인 요소가 (문건에)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계엄 선포를 철회시킬 수 있는 국회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시도가 구체적으로 명시돼있다는 점이다. 해당 문건에 따르면 기무사는 당시 국회의원 299명을 진보성향 160명, 보수성향 130명으로 분류하고,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 의원을 설득해 계엄해제 의결에 참여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계획했다. 또한 계엄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불법시위 참여 및 반정부 정치활동’ 혐의로 집중검거 후 사법처리 하는 계획도 명시됐다. 이 같은 내용은 2년마다 합동참모본부가 비상대비용으로 작성하는 편람에도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다. 기무사는 해당 문건에 대해 합참 편람을 참고했다고 해명한 바 있지만 세부 내용이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잃게 됐다.

주요 관계국에게 계엄에 대한 동조를 구하는 외교적 조치도 서술돼있다. 해당 문건에 따르면 기무사는 계엄 선포 후 국방부 장관이 주한 미국·중국대사를 초청해 계엄에 대한 양국의 이해를 구하고, 계엄사령관은 주한무관단을, 외교부장관은 기업 및 외신으로 구성된 주한사절단을 소집해 지지를 호소하도록 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이는 지난 1980년 5·17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조치 당시 군부가 미국 정부로부터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던 상황을 연상시킨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계엄 문건의 연관성에 대한 의구심도 증폭되고 있다. 해당 문건의 ‘유관기관 통제 방안’ 항목에는 “대통령께서 국정원장에게 계엄사령관의 지휘·통제에 따르도록 지시하고, 국정원 2차장을 계엄사로 파견시켜 계엄사령관을 보좌토록 조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임 소장은 “계엄 선포 후 대통령이 취할 행동이 문서에 명시된 것으로 보아 박근혜 전 대통에게도 보고됐을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이 해당 문건에 깊숙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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