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과 왜관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구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옆에 쓰러진 괴뢰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젠//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조지훈 ‘다부원에서’ 전문

낙동강과 왜관교. 물이 적시우고 가는 건 자갈이 아니다. 그 그늘에 자리 잡은 묵은 신음소리다. 물이 스치고 가는 건 풀잎이 아니다. 뿌리 없이 세상을 떠도는 망령들이다. ⓒ유성문

1950년 8월 1일,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왜관을 중심으로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했다. ‘Stand or die(사수냐 죽음이냐)’의 분계선이었던 이른바 ‘워커라인’은 서쪽으로 왜관에서 마산을 거쳐 진해로 이어졌고, 동쪽으로 영덕에까지 이르렀다. 왜관교를 비롯한 낙동강을 건너는 모든 다리들이 파괴되었고, 양측은 사선(死線)을 사이에 두고 필사적으로 대치했다.

8월 4일 오전 7시, 첫 포성이 울리면서 마침내 낙동강전투의 막이 올랐다. 당시 낙동강전투에 투입된 북한군은 총 13개 사단, 이에 맞서는 한미연합군은 8개 사단. 그나마 연합군이 믿을 수 있는 건 제공권뿐이었다. 8월 16일, B29 폭격기 98대가 출격해 불과 26분 동안 왜관 서북방 67㎢ 지역에 퍼부은 폭탄은 무려 3234개(960톤). 이 융단폭격으로 낙동강을 건너려던 인민군 4만 명 중 3만 명이 사망했으니 1초에 20명, 1분에 1150명꼴이었다.

다부동지구전적비. 지금은 다부리로 개명된 ‘다부원’은 조선시대 관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국가 관할의 ‘소야원’이 있었다. 지금은 역과 터는 사라지고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유성문

낙동강전투의 최대격전지였던 다부동 일대에는 지금까지도 채 발굴되지 못한 시신들이 묻혀 있다. 그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던 피아의 병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유학산과 가산의 산비탈에 묻힌 주검들은 이제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으련만, 그 위를 무심한 녹음방초가 뒤덮고 있을 뿐. 어쩌다 모습을 드러내는 주검의 흔적을 쓰다듬는 산 자의 진혼은 애달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칠곡에는 칠곡이 없다. 구 칠곡읍은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고, 지금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는 왜관이다. 팔공산 서쪽자락의 불교유적들을 제외하면 칠곡에는 뚜렷한 문화유적이나 내세울 만한 명소 또한 없다. 왜관과 다부동을 잇는 낙동강전투가 남긴 전쟁의 흔적이 칠곡의 가장 큰 문화유산이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왜관인도교는 오히려 서정적이다. 그해 여름은 꼭두서니보다 더 붉은 핏빛 서사(敍事)였건만, 강은 이제 모든 것을 다 망각한 듯 한가롭기만 하다. 그래서 강은 언제나 무심한 존재인 것인가.

구상 시인의 관수재. 칠곡군은 시인이 세상을 뜨기 이태 전 그가 머물렀던 관수재를 복원하고, 그 옆에 구상문학관을 지어 헌정했다. ⓒ유성문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구상 ‘오늘’ 전문

시인은 유달리 물과 강을 사랑했다. 어린 시절 그가 자랐던 원산 덕원마을 앞 들판을 유유히 흘러가는 적전강을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다는 그는 강에 대한 상념을 종종 시의 주요한 소재로 삼곤 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 칠곡 왜관으로 흘러온 시인은 아예 낙동강 가에 사랑채를 짓고 ‘관수재(觀水齋)’라 명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강물을 바라보면서 항상 무장무애할 수 있었을까. 그 또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종군했고, 초토(焦土)의 한 시대를 살다갔으니.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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