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편운재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은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마크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전문

안성을 갈 때면 안성 인터체인지가 아니라, 오산 인터체인지에서 길을 내린다. 거기서 ‘동으로 사십리’,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는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이다. 장재봉을 뒤로 하고, 어비리 저수지(송전저수지)를 앞에 두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이 남향마을에는 ‘꿈’이라고 쓰인 작은 깃발이 꽂혀 있다. 그 위로 조각구름들만 무심히 하늘을 떠가고…. 편운재(片雲齋). 이곳은 한 시인의 시와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이른 봄의 송전저수지. 이동저수지라고도 하고 어비리저수지라고도 하는 송전저수지는 수도권 최대의 좌대낚시터다. 봄, 가을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조사(釣士)들의 풍경은 제법 운치를 자아낸다. ⓒ유성문

1921년 안성 난실마을에서 태어난 시인 조병화는 평생에 걸쳐 창작시집 53권, 수필집 37권, 화집 5권 등 무려 16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펴냈다. ‘꿈과 사랑의 시인’이라 불리는 그는 ‘외로운 도시인의 실존적 모습’과, ‘허무와 고독으로서의 인간존재’가 ‘꿈과 사랑으로 자아의 완성에 이르는 생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쉬운 낭만의 언어로 그려냈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조예를 보여 시화전 등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그의 그림이 좋다.// 조물주의 낙서 같은 판화나/ 다 드러내놓지 않고/ 조금씩만 보여주는 유화나/ 그의 그림이 좋다.// 그가 아무리 많은 시집을 내도/ ‘조병화’라는 큰 책 한권에 당하랴. -김대규 ‘조병화1’ 전문

청와헌(廳蛙軒)의 조병화 시인 부조. 편운재 뒤편의 청와헌은 생전에 시인이 집필실로 사용했던 곳으로,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유성문

조병화 시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적 주제의 하나는 ‘어머니’였다. 그는 자신의 시적 자취를 ‘어머니를 찾아온 길’이라고 했다. ‘럭비는 나의 청춘, 시는 나의 철학, 그림은 나의 위안, 어머니는 나의 종교(‘나의 생애’)’라고까지 했다.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시인은 이듬해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시인에게 스승이었고 고향이었고 존재의 이유였다.

그래서 1962년 초여름, 평소 ‘살은 죽으면 썩는다’며 항상 부지런할 것을 가르쳤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인이 받은 상심을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듬해 한식날 시인은 난실리 어머니 무덤 옆에 산막을 짓고, 자신의 아호를 따 ‘편운재’라 이름 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이곳에 내려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이것이 현재 조병화문학관의 모태가 된 편운재의 시작이었다.

1993년 문을 연 조병화문학관은 시인의 손때가 곳곳에 묻어있다. 유독 조형물이 많은 것도 시인 생전의 작업과 무관치 않다. ⓒ유성문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중에서

편운재 입구에는 큰 글씨로 ‘꿈’이라고 새겨진 기념비 하나가 서있다. 이 비석은 시인이 사후에 제자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하여 생전에 미리 세워놓은 자신의 기념비였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조병화 ‘꿈의 귀향’ 전문

2003년 3월 8일, 시인은 완전히 귀향했다.

조병화 시인의 묘소. 아내,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의 묘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유성문

‘안성에 가면 무엇이든 있다’는 말을 만들어낼 만큼 번성했던 안성장(2·7일장)은 이제 영판 쇠락했다. ‘안성맞춤‘의 유기그릇도 가죽꽃신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안일옥 같은 노포와, 안성유기공방이나 중앙대 안성캠퍼스 내에 있는 안성맞춤박물관 쯤에서 그 명맥을 겨우 더듬어볼 수 있는 정도다. 그렇다고 그 풍성했던 안성의 민중문화적 내력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얼마간의 변용을 너그러이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현대화된 대중문화예술의 현장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주말을 장식하는 태평무전수관과 남사당전수관이 그렇고, 죽산의 웃는돌이나 무천이 그렇다. 너리굴이나 마노와 같은 문화예술공간에다 서일농원 같은 생활문화공간들도 한몫 거든다.

안성을 대표하는 사찰인 칠장사와 청룡사는 공교롭게도 전설적인 인물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바로 임꺽정과 바우덕이다. 임꺽정은 그가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스승 갖바치가 칠장사에 은둔해 있던 까닭으로 자주 이 절을 찾았다 한다. 안성유기와 함께 가죽꽃신이 안성의 특산물이 된 것도 이 갖바치가 가죽신 깁는 법을 주민들에게 가르친 탓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한 청룡사는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었던 바우덕이가 거점으로 삼았던 절이다. 바우덕이는 ‘안성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는 노래가 생길 정도로 장안의 인기를 끌었던 남사당 여자 꼭두쇠였다. 청룡사 인근에 그의 무덤이 있다.

자, 그럼….

안성유기와 남사당놀이. 전시관이나 전수관에서나마 ‘안성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유성문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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