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3미(味) 3색(色)

햇살 좋은 봄날 아침, 누군들 온고을 한옥마을 고샅길을 걷고 싶지 않은 이 있을까. 한옥과 한식과 한지, 그 멋과 맛에 취하고 싶지 않은 이 있을까. 바람은 외려 따뜻하고 햇살은 하염없이 느리니, 타박타박 걸음조차 시나브로 제멋에 취해 떠돈다.

전주야말로 봄날 도보요행지로 최적이라 할만하다. 조선왕조의 뿌리인 경기전을 중심으로, 마지막 황손이 머물고 있는 승광재와 오목대, 전주향교, 한벽당을 돌아 다시 전동성당에 이르기까지 8km 남짓의 전주 옛 도심 한 바퀴는 한나절, 아니 하루 종일이라도 고색창연한 봄 정취에 마냥 젖어들게 한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학창시절, 오목대에 올라 바라본 온고을의 모색(暮色)에 삐져버린 이래 무시로 전주 구석구석을 훑고 다닌 나로서는 이제 그 길도 좋지만, 그 길에서 만난 음식 때문에라도 다시금 전주를 그리워하게 된다. 비빔밥과 콩나물국밥, 거기에 막걸리 한 잔, 그 ‘곰삭은 맛’을 여전히 탐하게 된다.

전주의 문화, 전주의 정신을 말할 때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든다. ‘서로 조화를 이루지만 같아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같지만 같지 않다. 음식 또한 그렇다. 비빔밥과 콩나물국밥, 막걸리, 전주를 대표하는 3미(味) 속에도 3색(色)이 있다. 타박타박 전주 완상은 각자의 기호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전주 3미 그 오묘한 세계로 ‘한걸음 더 깊숙이’ 들어가 보자.

 

내 마음을 고명으로 얹어 주세요

-비빔밥

햇살 한 줌 주세요/ 새순도 몇 잎 넣어주세요/ 바람 잔잔한 오후 한 큰술에/ 산목련 향은 두 방울만/ 새들의 합창을 실은 아기병아리 걸음은 열 걸음이 좋겠어요/ 수줍은 아랫마을 순이 생각을 듬뿍 넣을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고명으로 얹어주세요 -정애정 ‘4월 비빔밥’

성미당의 비빔밥 ⓒ유성문

화합과 상생의 상징이라는 비빔밥이라지만 재료 차이, 그릇 차이, 양념 차이, 배합하는 손맛 차이가 그 전체 맛을 결정한다. 전주비빔밥의 재료는 30여 가지나 된다. 주재료는 밥, 콩나물, 황포묵, 쇠고기, 육회, 고추장, 참기름, 달걀 등이며 부재료는 무생채, 애호박볶음, 오이채, 당근채, 쑥갓, 상치, 부추, 호두, 은행, 잣, 김 등 무궁무진하다.

예전에는 화산동 고개의 미나리방죽에서 생산되는 미나리, 오목대에서 흘러나오는 녹도포 샘물로 만든 황포묵, 삼례와 봉동 근처에서 나는 무, 전주 북쪽의 신풍리에서 나는 호박 등을 최고로 쳤다. 어지간히 표준화된 지금은 얼마나 좋은 재료를 제철에, 지속적으로 쓰느냐가 관건이다. 주변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담는 그릇의 역할도 소중하다. 돌솥에도 담겨 나오는 곳도 있지만 전통을 살려 두툼한 놋그릇을 쓰는 곳도 많다. 밥이 쉽게 식지 않고 나물과 덩어리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전주비빔밥은 ‘비빈 밥’과 ‘비빌 밥’으로도 나눈다. 밥을 미리 비벼서 내오는 경우가 있고, 맨밥을 주고 스스로 비벼 먹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전주의 유명 비빔밥집 중 한두 곳은 ‘비빈 밥’이고 보통의 경우는 우리가 흔히 보는 ‘비빌 밥’이다. 손수 비비는 정성이 또 다른 가미의 요소일지 모르겠지만 게으른 나는 성미당의 ‘비빈 밥’을 즐겨한다.

◇성미당=1965년 개업한 성미당은 벌써 3대째 비빔밥의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 집의 비빔밥은 좀 색다르다. 우선 밥을 육수로 짓는다. 하지만 육수는 진하지 않는 것을 사용하는데 비빔밥 고유의 맛을 잃지 않기 위해서란다. 또 초벌볶음으로 비빈 밥을 육회, 표고버섯, 고사리 등 20여 가지의 고명등과 함께 올린다. 손님들은 간편하게 비비기만 하면 된다. 초벌볶음은 갓 지은 밥에 찹쌀고추장과 콩나물, 참기름 등을 넣고 살짝 비벼 볶는다. 정영자 대표는 50년 동안 손님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로 매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빚는 찹쌀고추장을 꼽는다.

◇가족회관=1979년 전라감영 터 인근에 개업해 3대를 이어오는 비빔밥집이다. 1대 김년임 대표는 농림축산식품부 전통식품 명인이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비빔밥 기능보유자다. 그만큼 전통에 가까운 비빔밥을 선보인다. 우선 곁차림으로 나오는 반찬들이 화려하다. 계란찜을 비롯해 10가지가 넘는 반찬이 나온다. 그야말로 12첩 반상이 들어맞는다. 소고기, 콩나물, 고사리, 호박, 오이, 황포묵, 다시마, 은행 등 20여 가지 재료가 들어간 비빔밥은 일단 정성이 느껴진다. 재료가 많이 들어갔어도 간이 세지 않아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진 사람들로서는 이런 부드러운 맛의 진가를 잘 모를 수도 있겠다.

◇고궁=전주시 덕진동에 위치한 고궁은 전주비빔밥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전주를 넘어서 서울에도 분점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타 지역에서도 인지도가 높다. 이곳 역시 놋그릇에 비빔밥을 내는데, 특히 육회비빔밥의 부드러운 맛이 손님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깔끔한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정갈해 가족나들이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비빔밥을 시키면 반찬과 함께 보리빵이 나온다. 보리빵으로 입가심을 하는 동안 은행, 밤, 잣 등 오실과가 들어간 군침 도는 비빔밥이 눈앞에 펼쳐진다. 전통음식점의 전문성을 높이고 한식의 세계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기도 했다.

 

달을 한 병 다 비우고 나서야

-막걸리

저녁마다 뽀얀 달을 마셔야 한다/ 집을 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에 그슬린 노가리 같은 얼굴로/ 달을 한 잔 마신다// 종일 썰어 놓은 살점들을 안주로/ 달을 한 잔 마신다// 달을 한 병 다 비우고 나서야/ 달이 되는 사람들// 코를 고는 달// 집을 짓는 일은 달이 되는 것이다 -김고니 ‘막걸리’

마이산막걸리의 상차림 ⓒ유성문

아무리 구경이 좋다지만 전주길 하루 발품에 슬슬 고단해졌는가. 그렇다면 괴나리봇짐 훌훌 벗어버리고 막걸리골목으로 달려가 ‘전주의 달밤’에 취할 일이다. 어느 결에 전주는 ‘막걸리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평화동, 삼천동, 서신동, 아중지구 등 시내 곳곳에 막걸리집이 성업 중이다. 어느 집이라 할 것 없이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안주는 전주의 인심과 손맛에 푹 빠져들게 한다. 막걸리 1주전자(3되)에 보통 2만원 안팎으로 받고 있는데, 20~25가지의 진귀한 술안주가 무제한 리필된다. 경남 통영의 ‘다찌집’처럼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받지 않는 식이다.

전주 막걸리집의 특징은 밥공기가 놓일 자리에 술잔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술을 올리면 술상이 되고 밥을 올리면 밥상이 된다. ‘없는 것 빼놓고는 다 나오는’ 안주는 고스란히 반찬이나 다름없다. 하긴 천상병 시인은 생전에 막걸리로 밥을 삼았다지 않은가. 그래도 줘도 너무 많이 준다. 값싸고 좋은 안주거리가 주변에 지천인데 더하여 저렴한 인건비 때문에 가능하다는 속사정을 듣고 보면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서신동·평화동 일대는 20~30대가, 삼천동 주변엔 30~50대가, 시장통의 허름한 옛 막걸리집들엔 주로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다지만 진정한 술꾼이라면 옛집, 요즘집을 가릴 일일까. 또 누구는 ‘술맛 나는 집’ ‘안주맛 나는 집’ ‘주모맛 나는 집’으로 특정해놓고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다니기도 한단다. 사람마다 취향이나 판단이야 다 다르겠지만 굳이 정해야 한다면 나는 ‘술맛 나는 집’으로 마이산막걸리를, ‘안주맛 나는 집’으로 홍도주막을, ‘주모맛 나는 집’으로는 한울집을 꼽겠다.

◇마이산막걸리=중화산동의 마이산막걸리는 한수이남 최고의 막걸리 맛을 자부한다. 하지만 찹쌀생주와 같은 독특한 술맛보다 두부김치, 김치찜, 상추무침, 호박쌈, 다양한 전과 수육, 족발, 머리고기, 홍합탕까지 일단 시키기만 하면 확 쏟아지는 안주발에 힘입은 바도 크다. ‘첫상(막걸리 3병or찹쌀생주or소주 2병or맥주 3병)’ 2만원(추가 시 1만5천원), ‘주인상(3번째 상까지+소주, 막걸리 무한리필, 4인 기준)’ 6만원이다(그 사이 더 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약간 비싼 듯도 하지만 상차림만큼은 거의 한정식 수준이니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는다.

◇홍도주막=효자동의 홍도주막은 1994년 처음 터를 잡을 때 횟집이었다. 그런 연유로 횟감 위주의 안주만큼은 보장할 만하다. 횟집 때 쓰던 수족관을 막걸리 저장고로 사용하고, 두 주전자 때부터는 안주를 골라 먹을 수 있다. 주점 벽면에는 20가지가 넘는 안주 사진이 걸려 있다. 이 집은 안도현 시인의 단골집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가끔은 시인이 주관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술집 중 제일 맛있는 집이야 ‘단골집’이거나 ‘외상 가능한 집’ 아니겠는가.

◇한울집=동문사거리의 한울집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집이다. 한적한 골목 안에 자리 잡은 자태도 그렇고, 술을 마시다 가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왔다가 바라보는 가게창 안의 형광등 불빛이 달빛처럼 교교한 집이다. 머릿수에 따라 아무렇게나 탁자를 뗐다 붙였다 할 수 있어 편하고, 무엇보다 주모의 인정이 정겹다. 요색은 아니어도 마치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듯한 황홀한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 그나저나 주문을 받으면서 굴무침을 ‘오이스터 공구리’로 부르는 우리 ‘콩글리시’ 아주머니는 여전히 잘 계시는지.

 

맑은 국물이 된다는 것

-콩나물국밥

콩나물은/ 허공에 기둥 하나 밀어 올리다가/ 쇠기 전에 머리통을 버린다// 참 좋다// 쓰라린 새벽/ 꽃도 열매도 없는 기둥들이/ 제 몸을 우려내어/ 맑은 국물이 된다는 것// 좋다 참/ 좋은 끝장이다 -이정록 ‘다시 나에게 쓰는 편지’

왱이집의 콩나물국밥 ⓒ유성문

아아, ‘전주의 달밤’이 좋다고 달려도 너무 달렸더니 기어코 떡이 되고 말았는가. 그렇더라도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전주에는 최고의 해장국 콩나물국밥이 있기 때문이다. 비빔밥과 함께 전주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가 콩나물국밥이다. 맑은 육수에 콩나물을 듬뿍 넣고 끓여내니 담백하고 시원한 맛으로 먹는 음식이다. 특히 술 마신 다음 날 해장으로는 단연 으뜸이다. 더구나 콩나물은 ‘싱싱한 비타민 보물창고’로 불린다.

전주의 콩나물국밥이 왜 유명한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전주의 콩이 언급된다. 전주 인근 임실의 서리태가 유명하고 인근 평야지대가 많으니 전주와 인근의 콩이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 전주의 맑은 물과 이를 자양분으로 기른 콩나물이니 더할 나위 있으랴.

전주콩나물국밥은 제조법에 따라 ‘끊여먹는 식’과 ‘말아먹는 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끓여먹는 식’은 서울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콩나물해장국이다. 처음부터 뚝배기에 밥, 콩나물, 육수, 갖은 양념을 넣어 펄펄 끓이다가 마지막에 날계란을 하나 톡 넣어 내놓는다. 국물이 엄청 뜨겁다. 그렇지만 구수하고 걸쭉하다. 전주콩나물국밥의 원조 격인 삼백집과 한일관이 이에 속한다,

‘말아먹는 식’은 ‘남부시장 식’이라고도 하는데 시간에 쫓기는 시장통의 노동자들이나 상인들이 즐기던 것이다. 뚝배기에 먼저 고슬고슬 식은 밥을 넣은 다음, 거기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면서 덥힌다. 소위 ‘토렴’이다. 살짝 데친 콩나물은 맨 나중에 넣는다. 뜨겁진 않지만 담백하고 시원하다. ‘끓여먹는 식’처럼 퍼지지 않아 밥알이 끝까지 살아 씹힌다. 전주에서는 ‘끓여먹는 식’보다 오히려 대세를 이룬다. 왱이집과 현대옥이 대표적이다.

◇왱이집=‘왱, 왱~’ 벌 떼처럼 손님들이 찾아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붙인 이름이란다. 뚝배기에 밥을 넣고 맑은 콩나물국을 말아 내오는데, 일단 너무 뜨겁지 않아 부담이 없다. 시원한 국밥과 함께 날계란(수란) 하나를 밥그릇에 담아온다. 뜨거운 국물을 몇 숟가락 부어 겉이 살짝 익은 계란에 김가루를 넣고 훌훌 마시는 맛이 고소하다. 밤새 술에 시달린 위장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는 역할을 한다. 콩나물은 무제한 리필이며, 후식으로 보리튀밥이 나온다. 여느 콩나물국밥집처럼 뜨뜻하면서 달보드레한 모주도 맛볼 수 있다.

◇현대옥=남부시장 골목 깊은 곳에 있다. 말이 ‘현대옥’이지 허름한 선술집에 가깝다. 두 사람이 지나가기 힘든 좁은 골목에 열차 객차처럼 길게 생긴 공간이다. 그런데 그 공간이 비좁아 오히려 ‘인간적’이다. 사람다운 정을 느낄 수 있는 이 집의 콩나물국밥 맛은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는다. 주문과 동시에 마늘과 청량고추를 바로 앞에서 다져 넣어준다. 그로 인해 칼칼하고 시원한 맛이 살아있다. 한 가지, 시장통 초입에서 파는 돌김을 따로 사야 한다. 이런저런 불편함으로 ‘다시는 안 와야지’ 하면서도 어느새 기다란 의자에 앉아있게 된다.

◇삼백집=전주콩나물국밥의 원조답게 숱한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았다는 일화부터 하루에 딱 300그릇 이상은 팔지 않을 만큼 자존심을 지켰다든지 하는, 콩나물국밥 한 그릇 먹는 재미 못지않은 이야기가 풍성하다. 특이하게도 쇠고기 자장에다 새우젓, 깍두기 등 맛깔스러운 밑반찬이 나온다. 식성에 따라 선짓국도 함께 주문할 수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신세대의 입맛에 부응하기 위해 김과 계란을 곁들이고 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를 완고함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편협한 생각일까.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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