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계획을 발표 중인 이성기 고용노동부 차관.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문재인 정부가 정규직 전환 대상인 공공부문 비정규직에게 호봉제 대신 직무급제를 적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지난 6일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맞춰 임금체계도 손볼 예정”이라며 “직무급제를 핵심으로 하는 ‘임금체계 표준안’을 마련해 이달 중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근속연수에 따라 기본급이 상승하는 호봉제와 달리 직무급제는 직무의 가치에 따라 급여가 결정된다. 정부는 직무급제 적용을 통해 호봉제로 인한 재정 부담을 줄이고 소속기관별 임금차이를 해소하겠다는 계획이다.

지난달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20만5000명을 2020년까지 정규직 전환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중 청소·시설관리·사무보조·경비·조리 등 다섯 개 직무분야의 14만명을 대상으로 직무급제가 우선 적용되며, 이후 개선작업을 거쳐 공공기관 전체로 확대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 직무급제 도입으로 임금격차 해소와 고용 창출 기대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부터 ‘산업단위 표준 직무급체계 산정’을 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공약으로 내세워왔다. 호봉제가 계속 유지될 경우 고용형태에 따른 임금격차는 유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기간 근속이 가능한 정규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임금 상승의 혜택을 보지만, 근속이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은 이러한 혜택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반면 직무의 종류에 따라 동일노동에 대해 동일임금을 적용하는 직무급제의 경우 고용형태에 따른 임금격차가 발생하는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재정적으로 호봉제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고민도 있다. 만약 20만명의 정규직 전환 대상자 전체에게 호봉자를 적용할 경우, 공공기관들은 향후 20만명의 고임금 고령층 노동자에 대한 인건비 부담을 떠안게 된다. 반면 직무급제의 경우 다른 직무로 이동하는 경우에만 승진·임금상승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에 따르는 인건비 부담이 경감된다.

이처럼 호봉제 폐지로 인건비 부담이 줄어들 경우, 절약된 비용을 청년층 고용 확대 및 고령층 고용 유지 등에 사용할 수 있어 고용창출의 효과가 기대된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선임연구위원이 2013년 발표한 ‘임금체계가 임금수준과 고용구조 및 경영성과에 미친 영향’에 따르면 직무급이 고령자 고용을 1.3% 높이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직무급제 도입에 따른 고용효과에 대해서는 향후 실증적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 승진기회 줄어들고 직무평가기준 모호해

하지만 직무급제 도입이 임금격차와 일자리부족에 시달리는 ‘헬조선’의 만능열쇠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직무급제는 이제 막 공공부문에 도입되는 상황이며, 민간부문으로 확대 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호봉제에 익숙한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이 직무급제로의 전환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기존 호봉제 하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적으로 기본급이 상승하며,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의 기회가 제공된다. 반면 직무급제의 경우 등급이 높은 타 직무로 이동하거나 새로운 직무가 신설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임금상승이나 승진 기회가 매우 제한적이다. 특히, 저성장 시대에 안착한 한국경제에서 고위 등급의 직무를 계속 신설할 정도로 팽창적인 조직 구조를 감당할 기업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직무급제 전환에 대한 기존 노동자들의 반발은 높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정부도 기존 공공부문 정규직의 반발을 우려해 정규직 전환 대상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이 경우 임금격차 해소라는 기존 취지가 무색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향후 동일직무를 수행하는 기존 정규직과 정규직 전환자가 직무급 전환시점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직군으로 분류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오히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아닌 차별노동 차별임금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더욱 핵심적인 문제는 어떤 직무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할 방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직무급제를 먼저 도입했던 미국· 독일 등 서구 국가의 경우 이미 직무분석 및 평가에 있어서 오랜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반면 오랫동안 호봉제를 유지해온 한국의 경우 노사 양측이 합의하는 직무분류 및 평가방법이 전무한 상황이라 합의점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국내에서 산업별 노사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것도 문제다. 직무급제의 경우 산업단위로 직무등급을 평가해 표준적 임금수준을 정함으로써 기업별 임금격차를 축소하는 효과를 가진다. 하지만 산업별 노사관계의 역사가 짧은 한국의 특성 상. 산업별 직무평가를 위한 산별 노사교섭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

지난 7월20일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방침을 접한 정부세종청사 청소근로자들이 밝은 표정으로 일터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직무급제, '헬조선' 대안될까?

문재인 정부는 임금격차 해소와 고용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직무급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직무급제 도입을 위해서는 호봉제에 익숙한 기존 정규직의 반발과 과학적 직무분석 및 평가방법의 개발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번 정부의 단계적 직무급제 도입 방침은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직무평가의 경우 노사 간의 갈등으로 합의할만한 기준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먼저 공공기관에서의 경험을 통해 객관적인 직무평가기준을 설정한다면, 향후 민간부문에서도 이를 참조할 수 있다.

또한 청소, 경비, 시설관리 등 저평가돼왔던 저임금 직군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질 전망이다. 정부의 이번 조치로 해당 직군에 대한 임금현실화가 이뤄질 경우, 향후 민간부문의 동일 직무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임금상승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

정부의 이번 직무급제 도입은 정규직 전환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제한적 조치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취업과 임금격차 문제로 고통받는 청년들이 한국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부를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서 직무급제 도입이 대안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는 첫 번째 시도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달 중 발표할 새 임금체계 표준안이 ‘헬조선’에 대한 백신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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