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생명은 연록색을 지니고 있다

2023-05-09     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1>

나뭇잎의 색이 담록(淡綠)으로 바뀌었다. 보름 전에는 연록(軟綠)이었다. 노란녹색으로 대기 속에 처음 나온 나뭇잎은 연하고 보드라워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순수한 것은 그 연함 때문에 극진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새싹으로부터 느꼈다. 부드러움과 연함은 이 거친 세상에서 지고지순의 미덕이다. 그 연록이 짙어져 이제는 맑고 투명한 담록으로 바뀐 것이다.

누구는 말한다. 벚꽃은 너무 빨리 져 아쉽기 짝이 없다고. 또 어떤 시인은 노래했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고. 새 연록 잎의 아름다움과 그 짧은 아쉬움 또한 벚꽃이나 모란의 개화에 비기지 못할 바 아닐 것이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생명은 그만큼 빨리 지나가지만, 그것이 보여준 짧은 시간 속의 순수함은 오래 살아있다. 

요즘 새벽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창을 내다보는 것이다. 방 유리창 너머는 개화산인데 요즘에는 산색이 하루하루 다르게 펼쳐진다. 먼동이 트기 직전의 산은 거룩한 서기(瑞氣)로 가득 차 있다. 차가운 대기 속의 잎사귀들은 정결한 초록과 무채색의 침묵이 뭔지를 알게 해준다. 날이 밝아지며 해가 솟을 때의 산은 은초록의 광휘를 보여준다. 한낮의 산은 당당한 초록으로 출렁이며, 저녁 무렵의 나뭇잎은 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푸른 빗소리를 낸다는 ‘녹우’(綠雨)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산에는 이팝나무꽃과 아카시아꽃이 한창이다.

<2>

슬픈 소식을 접하고 있다. 전국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양 모 지대장이 지난 1일 피의자 심문을 앞두고 춘천지법 앞에서 분신했다. 철근이나 형틀을 담당하는 토목 직종 건설노동자였던 양 씨는 유서에 “억울하고 창피하다. 정당한 노조 활동을 한 것뿐인데 윤석열 검찰 독재정치의 제물이 되어 지지율을 올리는 데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고, 죄없이 구속돼야 한다”라고 적었다. 그는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도 남겼다. 

그는 속초와 강릉 등의 건설 현장에서 조합원 채용, 노조 전임비 지급을 강요한 혐의(공동 공갈) 등으로 지난 2월부터 경찰 수사를 받아왔다. 검찰은 4월26일 양씨 등 강원건설지부 간부 3명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양씨는 이날 오후 3시께 다른 간부 2명과 함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강릉지원에서 받을 예정이었다. 이날 예정대로 열린 영장실질심사 결과 2명의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건폭’(건설노조+조폭)이라는 말을 신조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건설노조가 현장의 갈취, 폭력 등 조직적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정부의 시각과 정부의 폭주를 막아달라고 절규하며 자신의 목숨을 버린 노조원 사이의 이 엄청난 간극의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은 부동산 경기가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부동산 경기가 국가 경제를 이끌어온 동력이다. 과열된 부동산 경기 속에서 건설업계 비리가 차곡차곡 구조화되었다. 건설사업 계획 단계에서부터 사업종료 이후까지 전 과정에 걸쳐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비리가 저질러진다. 김학의 전 법무장관이 연루됐다고 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원주 별장 성접대 사건에서 드러난 건설업계의 비리는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기업 회장과 건설사 대표 등이 벌이는 환락 파티가 몇 달씩 계속되고, 동영상과 녹취록에는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가득했다. 등장하는 사람은 전현직 고위급 관료, 전 국회의원, 병원장, 언론사 간부 등 10여 명에 이른다.

건설 현장은 대부분 상시 고용을 하는 사업장이 아니다. 건설 현장이 개설되면 그때마다 채용을 위한 교섭이 진행된다. 건설 현장은 공정한 채용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건설 현장에 누적된 불법을 해소하려면 노조 때리기만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 건설노조에 씌워진 혐의 중 하나가 노동조합이 전문건설업체에 채용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건설산업기본법에 따르면 종합건설사의 하청인 전문 건설업체는 재하도급을 하면 안 된다. 노동자를 직접고용해야 한다. 그렇지만 건설 현장에는 불법하도급이 만연해 있다. 도급팀장들이 노동자들을 모아서 일감 따내기 경쟁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건설 현장은 고용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노조가 나서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인력소개소나 인맥에 의존해 취업하게 되고, 일자리 경쟁 때문에 임금 단가는 계속 낮아진다. 그래서 민주노총 건설노조 산하 토목건축분과위원회는 2017년부터 철근콘크리트협의회와 업종별 단체교섭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했고, 그 협약안에는 임금과 노동시간만이 아니라 고용조항도 포함돼 있다. 노동자들의 저단가 경쟁을 막고 노동조건을 보호하는 것은 노동조합의 당연한 권리다. 

노조가 나서기 이전의 건설 현장은 무법지대였다. 노동자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노동자들이 떨어져 죽는데 산재는 은폐됐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22년 재해조사 대상 사망자는 644명(611건)이다. 이중 건설업이 341명(328건)으로 53%를 차지한다. 제조업은 171명(163건), 기타업종은 132명(120건)이다. 건설 현장은 그만큼 열악하고 사고가 많다. 그나마 노조의 노력으로 8시간 노동이 정착했다. 안전 보호장구도 제대로 지급됐다. 퇴직금도 받게 됐다. 

건설노동자는 현재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청년층이 기피하는 대표적 일자리다. 건설 현장에 청년층 노동자 유입은 거의 없다. 50대 이상의 중고령자들 외에 현재 건설 현장을 지탱하고 있는 노동력은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건폭’의 문제라기보다 건설산업구조의 문제다. 정부와 언론에서는 이른바 '건설노조와의 전쟁'라는 험한 말을 사용한다. 혐오의 정치는 단기적인 지지율 상승을 불어올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위험하다. 누군가를 배척하는 배제의 정치는 사회구성원들에게 미움의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3>

“인생에는 웬만하면 탈출구가 있다. 조금만 더 살아보기를…”

며칠 전 노인들의 자살 문제를 다룬 사회 풍자연극 ‘슈퍼히어로의 탄생’(제작총괄 정중헌, 신성호 작, 김성노 연출)을 관람했다. 한국생활연극협회에서 창립 6주년 특별 공연으로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집단 자살을 논의하던 노인들이 자살을 실행하기 위해 펜션에 모인다. 저마다 죽을 사연을 지닌 사람들 속에 은둔형 젊은이도 한 명 끼어있다. 자살 실행을 하기 위해 물품을 점검해보니 번개탄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드러난다. 서로들 난감해한다. 그때 펜션에 불이 나 주인집 손자들이 위험에 처한다. 그러자 노인들이 화마 속으로 뛰어들어 아이들을 구해낸다. 

“죽을 결심을 했는데 뭘 못하겠냐고!”

아무 쓸모 없고 살 가치도 못 느끼던 노인들은 다시 용기를 내어 희망을 이야기한다. 생활연극협회 회원들인 아마추어 배우들이 수준 높은 연기를 선보인다. 

생명은 신성하고 아름답다. 봄이 아름다운 것은 어느 계절보다 생명의 환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건설노동자의 분신에 대해 대통령실은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남의 일처럼 말했다. 생명은 스스로 잘 가꿔야 하고, 고귀하게 대접받아야 한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겸손해져야 한다. 부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기를! 인간들 누구나 연초록으로 아름답고, 최선의 보호를 받는 세상이 되기를!!

임순만 작가 · 전 국민일보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