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글로벌 기금관 전경. 사진=국민연금
국민연금 글로벌 기금관 전경. 사진=국민연금

[이코리아]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대표소송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재계로부터 ‘기업 벌주기’라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반면 시민단체는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스튜어드십 코드 실천을 환영하며 재계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지난 11일 서울경제 등 언론보도에 따르면,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는 삼성·LG그룹 계열사, 현대자동차, GS건설, 롯데쇼핑·하이마트, SK네트웍스 등 20여개 기업에 주주대표소송 서한을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한이 발송된 기업은 과거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을 부과받거나 형사 기소된 전력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자 보건복지부는 13일 해당 보도에 대해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는 주주 대표소송 서한을 발송한 바 없으며,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지난 12월 기업 주주가치 훼손 관련 사건의 정확한 사실관계 등 확인을 목적으로 비공개 서한을 발송했다”고 해명했다. 비록 기존 보도 내용과 다르게 발송 주체가 수책위가 아닌 기금운용본부라고 하지만, 국민연금이 주주가치 훼손 행위에 대한 자료를 기업에 직접 정리해 제출하라고 요청했다는 점에서 향후 적극적인 주주대표소송이 예상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주주대표소송은 대주주나 경영진이 회사에 손해를 끼칠 경우, 주주들이 회사를 대표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경영진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장사인 경우 회사 주식의 0.01% 이상(일반 법인은 1%)만 보유하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소액주주들이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는 데는 비용문제 등 상당한 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주주권리를 행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실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왔다. 국민연금이 소액주주를 대변해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여함으로서 대주주 및 경영진의 독단을 막고 투명한 경영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 

실제 복지부는 지난달 24일 열린 제10차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대표소송 결정 주체를 수책위로 일원화하는 ‘수탁자 책임 활동 지침’ 개정안을 상정한 바 있다. 기존에는 기금운용본부와 수책위가 대표소송 여부를 결정했는데, 이를 수책위로 일원화해 적극적인 주주권리 행사에 나서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 재계, "국민연금, '기업 벌주기' 멈춰야"

국민연금이 기존 지침을 변경하고 주주가치 훼손 관련 자료를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재계에서는 우려와 불만이 확산되고 있다. 실제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코스닥협회 등 7개 경제단체는 지난 10일 공동 성명을 내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기금확충에 전력을 다해도 부족한 터에 국민연금이 불투명한 장기 주주가치 제고와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른 수탁자 의무 이행을 명분으로, ‘기업 벌주기식’ 주주활동에 몰두하는 위와 같은 행태에 경제계는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대표소송은 그 결과와 무관하게 기업의 신뢰도와 평판에 큰 타격을 주며, 기업이 승소하더라도 기업가치의 원상회복이 불가하다”며 “경영권을 지켜낼 변변한 방어수단 하나 없는 상황에서 복지부와 국민연금이 경제계 우려와 제언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개정안을 무리하게 강행하는 것은 명목상 주주가치를 앞세운 실질적 경영 간섭”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표소송 관련 규정을 ‘지침’이 아닌 ‘법률’로 명확히 규정할 것 ▲경영진의 사익을 위한 고의적 불법행위가 확정된 경우로 대상을 한정할 것 ▲대표소송의 실익에 대한 검증장치를 마련할 것 ▲수책위가 아닌 기금운용본부에서 대표소송 여부를 결정할 것등을 요구했다. 경제단체들은 “수책위는 기금운용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수익률과 무관하게 정치·사회적 이해관계 및 여론에 따라 소 제기를 결정할 유인이 매우 높다”며 실제 기금운용을 담당하는 기금운용본부가 소송 실익 등을 검토해 소송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시민단체, "국민연금, 주주대표소송 적극 나서야"

반면 재계의 주장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왜곡하고 있다며, 오히려 국민연금이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참여연대는 지난 11일 발표한 논평에서 “주주대표소송은 선관의무를 가진 이사가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경우 주주들이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오너리스크와 기업의 불법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장치에 불과하고 ‘기업 벌주기’와는 무관한 정상적인 주주활동”이라며 “경총의 주장은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투명한 지배구조로의 개선을 위한 스튜어드십 코드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책위가 아닌 기금운용본부가 대표소송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수책위는 박근혜 게이트 당시 국민연금이 권력에 종속되어 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한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구성된 것”이라며 “수책위를 패싱하자는 주장은 사실상 게이트 이전으로 회귀하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반박했다. 

경제개혁연대 또한 이날 논평에서 “경제단체들이 국민연금 주주대표소송에 반대하고 나서는 것은 ‘기업 벌주기식 주주활동’이라며 비난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제도 정비를 구실로 시간을 끌며 국민연금의 소송을 막아보겠다는 의도일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경제개혁연대는 경제단체들이 요구한 ‘대표소송의 실익에 대한 검증장치’는 이미 지난 2018년 이후 정비가 완료된 상태이며, 수책위 또한 기업과 노동자, 지역가입자 등 3자 추천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정치·사회적 이해관계 및 여론에 따라 소송을 결정할 것이라는 비판도 근거가 없다”고 강조했다. 

기업들이 주주대표소송의 부담을 과장하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실제 경제개혁연구소가 지난 2018년 발표한 ‘1997~2017 주주대표소송 현황과 판결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1년간 판결이 내려진 주주대표소송은 137건으로 이 가운데 상장사에 대한 것은 47건에 불과했다. 1년에 겨우 2건의 대표소송이 제기되는 셈이다.

이는 미국에서 매년 400건 가량의 주주대표소송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편이다. 승소해도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가 아닌 회사가 손해배상을 받기 때문에 소송 유인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투자자들이 비용 부담을 짊어지고 대표소송을 제기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에서 적극적으로 소송을 이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최근 들어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멸공’ 논란, 카카오페이 경영진의 주식 처분 논란 등 오너리스크로 인해 주가가 급락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 소송 비용을 부담하기 어려운 ‘개미’를 대신해 국민연금이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는 분위기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기금의 대표소송 관련 대상기업 선정, 소송 제기 시기 등은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 없으며,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우려 등을 고려하여 기금의 장기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에 따라 투명하게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영 간섭’과 ‘주주권익 대변’이라는 찬반 양론 사이에서 국민연금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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