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자, 가을 스케치-1, 혼합재료, 10호
양희자, 가을 스케치-1, 혼합재료, 10호

 

시월, 그것도 초순, 
푸른 하늘이 그니의 이마를 닮고 

바람은 그니의 머리칼을 닮아서 좋다.
높았던 능선이 그니의 어깨만큼만 낮아지고
이파리들이 살짝 그니의 귀여운 근심 같아서 좋다. 
투명한 잠자리 날개 같은 그니의 숨소리 
슬픈 것을 떠올리며 그니가 흘리는 눈물 같은 이슬 
그래서 시월이 좋다.

계절성 비염이 오는 시월, 
자음도 모음도 둥글게 구부리는 그니의 콧소리가 좋다. 
외투를 벗어서 그니에게 입혀 줄 수 있는 시월, 
그래서 시월이 좋다.

들녘 풀잎을 하나 씹으면 그니의 입 냄새, 
나무 그늘에 잠시 쉬면 그니의 몸 냄새가 나는 시월.
그니의 볼연지, 입술연지같이 살짝 물들기 시작하는 산 빛 그래서 시월이 좋다.

흰 구름이 그냥 앉을 것 같은 그니의 견주 뼈, 
그니의 목선처럼 허리선처럼 흔들리는 갈대, 
그래서 그니의 변덕처럼 약간 흐리기도 하는 시월,  
귓바퀴에서는 가을벌레 울음소리, 
그니의 봉긋 솟은 가슴은 눈부신 시월의 노래다. 
그래서 시월이 좋다.

그니의 몸이 가벼워진다, 시월에는 
새의 다리 같은 정강이, 솜사탕처럼 살짝 부푼 배
그니의 발은 발가락은 항상 부산하게 움직인다.
어디론가 그니는 떠나고 싶어 한다. 
그니가 상상하는 그곳으로 가없이 날아가는 새가 되고 싶어 한다. 
시월의 바람처럼 노래하는 그니는 나그네가 되고 싶어 한다. 
그니의 자유 같은, 따뜻한 사랑 같은 시월, 
그래서 시월이 좋다.

그니를 똑 닮아가는 시월, 그것도 초순 그래서 나는 시월이 좋다,
참 좋다. 

며칠 강원도에 다녀왔습니다. 적당한 햇볕, 적당한 온도, 적당한 바람, 눈부신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이런 것들이 내 몸과 마음에 주는 안온감은 더없이 ‘적당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날씨가 좋다고 해도 이렇게 몸과 마음의 쇄락감灑落感을 느끼게 하는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춥거나 덥거나 쌀쌀하거나 습하거나 건조할 때도 적지는 않지요.

이 시는 곱고 청아하고 상쾌한 시월의 날씨에 대한 일종의 헌사입니다. 이것을 여자에 비유했을 뿐이지요. 여러분들도 이 계절에 대한 글 써보길 청해봅니다. 그 내용은 분명히 아름답고 발랄하고 우아할 것입니다. 그러면 시월은 바로 당신의 것이 되겠지요.

‘그니를 똑 닮아가는 시월, 그것도 초순 그래서 나는 시월이 좋다,’ 시월은 참 좋습니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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