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원정연.
사진 원정연.

 

빗소리가 내 몸의 일부를 허문다네.
벽에 등을 기대면 
청춘은 벌써 저쪽 하구로 밀려가 있고
시간은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는다네.

추억은 추억과 더불어 소생하나
꽃이나 잎처럼 삶은 다시 피질 않으니
지나간 많은 날들은 
저 밖에서 비에 젖을 뿐이네.

머리를 들면 비 내리는 하늘은 머나
흘러가는 물소리는 더욱 멀구나.

이제 멀리는 보지 않기로 한다네.

기억 속에는 항상 팽팽한 슬픔이 담겨 있는 법
약속 날짜를 월력에 쓰거나 지우며
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네.

흘러가는 물을 보는 것은 마음의 응어리나 찌꺼기를 흘려보내는 일입니다. 세월을 추억을 슬픔을 물속에 풀어 넣는 일입니다. 상처를 줬던 사람을 흘려보내고 상처 받았던 나를 흘려보내는 일일 겁니다. 원망이나 증오로 바위처럼 붙박여 있던 나를 녹이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이 물을 쳐다보는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기억 속에는 항상 팽팽한 슬픔이 담겨 있는 법 / 약속 날짜를 월력에 쓰거나 지우며 / 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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