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사진=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사진=현대자동차그룹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로 사익편취(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이 크게 확대되면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일가가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어떻게 처리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앞서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사익편취 규제 기준인 오너일가 지분율을 상장사 30%, 비상장사 20%에서, 상장·비상장사 모두 20%로 강화하는 내용이 담긴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규제 대상이 현행 210개에서 598개로 388개 늘어나면서 사익편취 사각지대가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개정안 통과로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된 곳 중 하나다. 바뀐 법에 따르면, 현대차는 사익편취 규제 대상인 계열사가 기존 4개에서 8개로 늘어나고 관련 내부거래액도 200억원에서 3조1500억원으로 증가한다. 

새로 규제 대상에 포함되는 계열사 중 가장 핵심적인 곳은 물류회사인 현대글로비스다. 지난해 현대글로비스가 국내 계열사와의 거래로 올린 매출은 약 3조1220억원이다. 현대글로비스의 국내계열사 대상 매출액이 3조원을 넘어선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다. 지난 2016년 20.6%(2조5220억원)였던 내부거래 비중도 매년 늘어나 지난해 기준 21.6%를 기록했다. 여기에 해외 계열사와의 거래까지 더하면 내부거래 비중이 60%를 넘어선다.

현재 정의선 회장과 정몽구 명예회장은 각각 23.3%, 6.7%씩 총 현대글로비스 지분 29.9%를 보유하고 있다. 당초 정 회장 부자의 지분율은 43.4%였지만 사익편취 규제를 피하기 위해 기준인 30%보다 0.1% 부족한 수준으로 지분율을 낮춘 것. 

하지만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시행되는 1년 뒤까지 10%의 지분을 처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14일 기준 현대글로비스 시가총액은 약 7조500억원(주당 18만8000원)으로 총 7000억원의 주식을 매각해야 하는 셈이다.

문제는 정 회장 부자가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이 향후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국내 10대 그룹 중 유일하게 현대모비스(21.4%)→현대차(33.9%)→기아차(17.3%)→현대모비스로의 순환출자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현대차그룹은 지난 2018년 모비스의 A/S 부품 및 모듈 사업부를 분할해 글로비스와 합병하고, 모비스 존속법인을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두는 지배구조 개편안이 발표한 바 있다. 정 회장이 보유한 합병법인 지분을 매각한 뒤 존속법인 지분을 매입해 경영권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당시 개편안은 외국인 및 기관투자자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여전히 현대글로비스는 향후 지배구조 개편의 중심에 서있는 회사다. 현대글로비스가 성장해 지분 가치가 높아질수록 향후 정 회장의 그룹 지배력도 강화되기 때문.

실제 현대글로비스는 최근 이슈가 된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에 참여하는 등 그룹 차원의 신사업 진출 전략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한준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14일 “전기차배터리 렌털사업, 수소운반선사업, 로보틱스사업 등 현대차그룹 미래 먹거리가 현대글로비스에 집중되는 양상”이라며 “현대글로비스 주가는 신사업 진출방안이 구체화되는 시점마다 다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382회 국회(정기회) 제15차 본회의에서 공정거래법 일부개정법률안 등이 통과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382회 국회(정기회) 제15차 본회의에서 공정거래법 일부개정법률안 등이 통과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하지만 공정거래법 개정안으로 인해 정 회장은 현대글로비스의 신사업 진출 성과가 구체화되기도 전에 지분 매각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일각에서는 지난 2006년 정 회장 부자가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기부하기로 했던 사실을 지적하며, 14년 만에 미뤄둔 약속을 지킬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당시 정몽구 명예회장은 현대글로비스를 타깃으로 한 검찰의 비자금 수사가 시작되자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윤리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동안 경영권 승계 관련 의혹이 제기되었던 개인 보유 글로비스 주식 전량을 조건 없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실제 정 명예회장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총 8500억원 규모의 현대글로비스·이노션 지분을 정몽구 재단에 출연했다. 하지만 정의선 회장의 지분은 전혀 기부되지 않은 데다, 2018년에는 이를 활용한 지배구조 개편안까지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현대글로비스 지분이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가진 중요성을 고려할 때, 정 회장이 이제 와서 지분을 기부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 회장은 기부 약속과 관련해 별다른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다만 법안이 개정된 만큼, 정 회장 부자가 보유한 지분을 처분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공정위는 “사익편취 규제는 정상적인 내부거래는 허용하되, 부당한 내부거래는 엄격한 조건 하에 사후적으로 규제하는 것이며 지분 매각의무를 부과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이지만, 일단 공정위의 감시망에 들어갈 경우 부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 

내부거래 비중을 줄이는 방법도 있지만 사업 특성상 이 역시 쉽지 않다. 당장 올해 상반기 글로비스 전체 매출 6조4086억원 중 4조4782억원이 현대·기아차, 현대제철, 현대위아 등 특수 관계자와의 거래를 통해 올린 것이다. 70%에 달하는 내부거래 비중을 1년 만에 급격하게 줄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법률 개정으로 위기를 맞은 정 회장이 신사업 진출 전략과 지배구조 개편 계획의 핵심인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어떤 방식으로 처분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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