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7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날 국무회의에서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3건에 대한 비준안이 의결됐다. 사진=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날 국무회의에서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3건에 대한 비준안이 의결됐다. 사진=뉴시스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비준하지 않은 4건 전부가 아닌, 105호를 제외한 나머지 3건에 대해서만 비준을 추진하기로 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7일 제34차 국무회의에서 ILO 핵심협약 29호, 87호, 98호 등 3건에 대한 비준안을 심의·의결했다고 밝혔다. 비준안은 대통령 재가를 거쳐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ILO 핵심협약은 노동자의 기본권리 보장을 위해 ILO에서 정한 국제노동기준으로,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금지 ▲차별금지 ▲아동노동금지 등 4개 분야에 걸쳐 8개 협약으로 구성됐다. 현재 ILO 187개 회원국 중 146개국이 8개 협약을 모두 비준했으며, 한국은 차별금지 및 아동노동금지 두 분야의 4개 협약만 비준한 상태다. 

정부가 비준을 추진 중인 핵심협약은 모든 형태의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29호, 노조 설립 및 가입 자유를 규정한 87호, 노조원에 대한 차별 및 불이익을 금지한 98호 등 3건이다. 반면, 29호와 마찬가지로 강제노동과 관련된 105호는 이번 비준안에서 제외됐다. 

105호는 정치적 견해 표명이나 파업 참가에 대한 처벌 수단으로 강제노동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다. 또한, 경제발전을 위해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거나, 인종·민족·종교적 차별대우의 수단으로 강제노동을 활용하는 것도 금지된다. 비교적 비준율이 낮은 87호, 98호와 달리 105호는 186개국 중 175개국이 비준했을 정도로 비준율이 높은 보편적 조항이다. 

하지만 정부는 경영계의 우려가 높은 결사의 자유 관련 조항은 비준하면서도 강제노동과 관련된 105호는 배제했다. 이는 해당 협약이 국내법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국내 형벌체계는 실정법을 위반한 정치적 견해 표명 및 쟁의행위 참가 등에 대해 징역형 규정을 두고 있다. 실제 집시법을 위반한 경우 6개월~3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으며,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의 ‘수괴’에 대해 무기징역 및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무원 또한 국가·지방공무원법에 따라 정치활동에 대한 처벌로 3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국내 형법상 징역형은 ‘노역’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에 대해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하는 것도 105호에 저촉되는 사안이다. 게다가 지난 2010년 형법 개정으로 복잡한 형벌이 사형·징역·벌금·구류의 네 가지로 단순화되면서 금고형과 징역형이 통합돼 105호 위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 상태다. 

이 때문에 105호를 비준하려면 관련 법에서 징역형을 삭제하고 이를 금고형이나 벌금형 등으로 대체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형벌체계는 과실범에게만 금고형을 부과하도록 돼 있어 당장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에 이를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 지난해 10월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안을 국회에 제출했을 때도 105호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당시 노동계를 중심으로 정부의 105호 제외 결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민주노총은 지난해 8월 성명을 통해 “강제노동금지에 관한 29호 협약은 비준하면서 105호 협약은 비준하지 못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모순”이라며 “정부는 105호 비준을 거부함으로써 정치적 견해에 강제근로를 부과하고 경제발전을 위해 노동을 동원하며 파업 참가에 대한 제재를 계속하겠다는 것인지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105호의 비준안 배제를 비판하는 것은 노동계만이 아니다. 지난해 5월에는 전·현직 사회복무요원 수십여 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사회복무요원제도 폐지 및 105호 비준을 촉구한 바 있다. 이들은 “정부는 핵심협약들의 비준에 있어서 105호를 비준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는데, 이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당사국인 대한민국이 강제징용의 정당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국제사회에 비칠 우려가 있다”며 “정부는 105호까지 필수적으로 비준하여, 대한민국의 인권보장국가로서 국제적 위상을 더 이상 추락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고용노동부는 105호를 비준안에서 제외한 이유에 대해 “105호 협약 취지를 국내법에 반영하기 위해서는 관련 징역형 자체를 삭제하거나 금고형으로 전환하는 등 법 개정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서는 금고형을 주로 과실범에게 부과하는 우리나라 형벌체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고용노동부는 이어 "분단국가 상황 등을 고려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도 선행될 필요가 있어, 관계부처 협의 결과에 따라 향후 추가적 검토 후 비준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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