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렘데시비르 물량 독점으로 전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사진은 국내 의료진이 선별진료소에서 검채 체취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미국의 렘데시비르 물량 독점으로 전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사진은 국내 의료진이 선별진료소에서 검채 체취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미국이 향후 3개월간 생산될 렘데시비르 물량을 ‘싹쓸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백신 확보에 나선 각국 정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이기적 조치로 인해 '백신 민족주의'가 확산될 경우 코로나19 종식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2일(현지시간) CNN, BBC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길리어드 사이언스가 제조하는 렘데시비르의 7월 생산량 전체와 8~9월 생산량의 90%를 확보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상 3개월간 생산량의 대부분을 독점한 것으로, 이는 약 50만회 이상의 치료과정에 사용될 수 있는 분량이다. 

미국의 렘데시비르 독점 소식을 접한 국내 누리꾼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엇갈리고 있다. “전 세계적 팬데믹에 백신 독점은 파렴치한 행위”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지만, “어떤 정부도 자국민의 건강을 우선할 수 밖에 없다”며 미 정부를 두둔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가난한 국가가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문제지만, 자기 나라의 안위를 우선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

◇ 렘데시비르 독점한 미국, 자국 이기주의?

하지만 미국의 렘데시비르 독점은 당위성과 실효성 모두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우선, 길리어드 사이언스의 백신 개발 과정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가 참여했다. 아시아 6개국, 유럽 7개국 등 총 13개국이 지난 3~6월 렘데시비르의 임상 시험에 참여했으며, 한국 또한 국립중앙의료원과 서울의료원, 경북대병원 등 총 3곳에서 임상 시험이 이뤄졌다. 국제적인 협력을 통해 효과를 검증한 코로나19 백신을 국가별 확산 정도와 무관하게 한 국가가 독점한다는 것은 과도한 국가 이기주의다. 

또한, 백신 독점이 코로나19의 완전한 종식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지 았다. 코로나19처럼 감염병이 세계적으로 유행할 경우, 사태의 종식 또한 국가 단위가 아닌 전 세계를 단위로 판단해야 한다. 국가간 인구이동을 완전히 금지한 것이 아니라면, 미국 내에서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된다 하더라도 3차, 4차 확산의 위험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국가에서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지 않는다면 글로벌 공급망도 제대로 작동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회복 속도도 둔화될 수 밖에 없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 독점한 백신이 미국인들에게 제대로 공급될지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실제 미국 정부는 길리어드사이언스와 렘데시비르 계약을 맺으면서, 대부분의 물량을 미국에 공급하는 대가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했다. 실제 알렉스 아자르 미 보건부(HHS) 장관은 지난 2월 하원 청문회에서 “민간의 (백신 개발)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백신 가격을 통제할 수 없다”며 “향후 백신 가격이 적절할지 보장하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길리어드사이언스가 책정한 렘데시비르 가격은 공공보험 가입자의 경우 1회당 380달러(약 45만원) 민간보험 가입자의 경우 520달러(약 62만원)다. 5일간의 투약 치료를 가정하면 공공보험 가입자는 2340달러(281만원), 민간보험 가입자는 3120달러(375만원)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경제활동이 멈추고 실업률이 급등하면서 생계를 위협받는 저소득층에게 미 정부가 독점한 렘데시비르는 '그림의 떡'에 가깝다.

아나 산토스 러치맨 세인트루이스 대학 교수는 지난달 17일 호주 비영리매체 ‘더 컨버세이션’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 납세자들은 이미 상당한 비용을 백신 연구·개발에 지불했다”며 “만약 코로나19 백신을 적절한 가격에 공급할 수 없다면, 빈곤층 및 취약·소외계층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백신 개발 공급 상호 협력해야 코로나 19 종식

‘백신 민족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9년 신종플루(H1N1) 유행 당시에도 부유한 국가들이 백신 확보 경쟁에 나서면서, 가난한 국가에 백신 공급이 지연돼 사망자가 무려 57만명이 넘을 정도로 사태가 악화됐다. 

미국의 렘데시비르 독점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비난도 “누워서 침 뱉기”에 가깝다. 영국은 지난 5월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와 1억명분의 백신을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고, 프랑스·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 등 4개국도 ‘백신 동맹’을 체결해 아스트라제네카와 공급계약을 맺고 4억명분의 백신 물량을 확보했다. 미국의 렘데시비르 독점 이전부터 백신 확보를 위한 국가간 경쟁이 과열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것.

전문가들은 국제적인 백신 개발·공급 협력 없이 코로나19 사태의 종식은 요원하다며, ‘백신 민족주의’ 확산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러치맨 교수는 “백신 민족주의는 세계 공중보건 원칙과 상충된다”며 “세계보건기구(WHO)를 포함한 국제기구가 공중보건 위기에 맞서 공평한 백신 공급을 위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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