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파두리 외곽토성. 저 길을 따라가면 삼별초를 만날 수 있을까.

 

제주시내에서 서쪽으로 20분 채 안 걸리는 거리, 삼별초가 진도에서 여몽연합군에게 패한 후 제주로 와 자리 잡은 최후거점.

삼별초(三別抄)는 고려 최씨 무신정권 때의 특수군으로 야별초(좌별초, 우별초)와 신의군을 합쳐 이르는 말이다. 야별초는 처음에는 도둑의 무리를 막고 개경을 지키기 위해 선발한 집단이다. 그런데 도둑의 무리가 갈수록 늘어나자 인원을 더 충원해 부대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눈다. 그 이후 몽골과 전쟁을 치르면서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병사들로 또 하나의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 했는데, 삼별초는 이 세 부대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몽골의 내정간섭을 받은 고려 정부는 1232년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를 했다가 1270년에 결국 개경으로 환도를 한다. 그러나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왕족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10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강화에서 진도로 거점을 옮겨 성을 구축하는데 그곳이 용장성이다.

진도 앞바다는 훗날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곳이면서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지역이기도 한 울돌목이다. 실제로 울돌목을 가보면 물살이 거세게 몰아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진도를 거점으로 정한 것은 수전에 약한 몽골을 상대하기에 적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려정부와 몽골의 연합작전에 의해 배중손은 1271년 5월 용장성에서 전사를 하고 전투에서 패한 나머지 군사들은 탐라로 다시 퇴각을 한다. 그들이 탐라를 거점으로 삼은 것 역시 몽골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가 항파두리는 주위 지형보다 높고 자연 해자(垓字)가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아울러 성내에 용천수가 있어 물 공급이 자유스러운 데다가 농사를 짓고 기와를 빚을 수 있을 정도로 흙이 고우니 이보다 더한 조건이 없었을 것이다.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거점을 옮길 때 이미 탐라를 최후 거점으로 낙점했을 거라는 해석이 일리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된다.

이 때 고려정부는 삼별초가 탐라로 이동할 것을 예상하고 이미 제주에 고여림을 보내 해안가에 돌담을 쌓게 했다. 해안을 끼고 길게 쌓은 성, 그러니까 이 환해장성은 나중에 삼별초가 장악해 증축을 하면서 정부군을 방어하는 진지로 활용한다. 삼별초의 난이 끝난 후에는 다시 왜구를 비롯한 외적을 방비하는 데 활용된다. 지금은 중간중간 남아있는 게 5km 정도 되는데 제주 해안을 돌다 보면 종종 만나게 된다.

진도를 떠나 탐라 서쪽해안인 명월포로 먼저 입도한 삼별초 장수 이문경(李文京)은 지금의 제주시 동쪽 오현고등학교 부근의 동제원(東濟院)으로 군사를 이끌고 와 교두보를 마련한다. 그 후 김수, 고여림이 이끄는 고려의 관군과 싸워 승리한 후 다시 조천포를 장악하여 진도에서 후퇴한 삼별초 본군의 탐라 입성을 도움으로써 삼별초의 제주 안착을 마친다. 그러나 1273년 음력 4월, 진압군 1만여 명이 탐라에 상륙하고, 삼별초는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무너지고 지휘자 김통정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2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은 막을 내린다. 그 역사적 현장이 항파두리다.

비록 무신정권 유지를 위한 사조직으로 출발했을지 모르나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항쟁하던 끝에 스러져 간 민족의 자존심. 많은 사람들이 삼별초를 그렇게 기린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

평화로에서 내려오는 길과 바다쪽에서 올라오는 길목에서 만나는 삼거리 한가운데에 팽나무가 교통경찰처럼 서있다. 거기에서 항몽유적지를 향해 걷다보니 오른쪽으로 코스모스가 바람에 살랑이고 있다. 사람의 손길에 의해 만들어진 포토존이다. 그래도 아름답다. 그러나 시선이 좀 더 먼 곳으로 향한 순간 등줄기가 쭈뼛해진다. 엄청난 양의 천조각으로 수놓은 설치물에 쓰인 ‘깨어있는 시민의 힘’.

 

사람에 의해 조성된 코스모스밭과 설치물. 왜 섬뜩한 느낌이 들까.


‘깨어있음’, ‘시민의 힘’. 이렇게 멋진 말들이 내게는 왜 무서운 구호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태극기가 성조기와 나란히 펄럭이는 집회현장을 하도 많이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군사정권시절에 만들어 마을 곳곳에 세워놓은 ‘바르게 살자’는 비석이 불러오는 거부감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까. 왜 하필이면 여린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꽃밭에 ‘깨어있는 시민의 힘’을 설치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아, 그러고 보니 부당한 외세에 저항하는 결집된 힘을 보여주자는 의미인 것 같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설치장소도 그렇지만 의도도 잘못됐다. 삼별초의 항쟁을 깨어있는 시민정신으로만 단정짓는 것은 그들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제주인들을 명분에 가둬두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과 휴게소, 안내소는 여느 곳과 다를 바 없다. 내성이 있던 자리에는 여전히 발굴이 진행되고 있고, ‘이곳이 추모의 장이오’ 하고 안내하는 순의문과 향이 타고 있는 순의비도 관에서 운영하는 여타 유적지와 다를 바 없다. 대신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 해서 들른 기념관은 그러나 현장에서 발굴된 각종 토기류가 진열된 유리관과 전투장면을 묘사한 거대한 유화가 차지한 벽면뿐이다.

유신 말기, 흔들리는 정권을 틀어잡기 위해 ‘호국정신과 총화단결’을 내세워 급조한 흔적이 역력한 기념관에 더 오래 머무는 게 불편하다.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각인시키는 ‘전쟁터의 성역화’에 얼마나 많은 세금이 들어갔는지 나는 계산이 안 되는 기록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기념관을 서둘러 나와 외성으로 향했다. 어릴 때 뛰어놀던 시골동네의 나지막한 둑처럼 길게 이어진 토성을 따르며 걷다 보니 이 길을 걸으면 삼별초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어린아이 같은 상념이 든다.

얼마를 걸었을까. 시골마을의 버스정류장처럼 보이는 작고 낡은 슬레이트 건조물이 나온다. 창고 같기도 하고 눈비와 따가운 햇볕을 피하라고 세워놓은 대피소 같기도 하다. 무심코 바라본 벽면에 쓰인 짧은 글이 눈을 파고든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섬 제주.

두려움과 희망은

늘 바다 넘어서 밀려왔다.

1271년

그날 하늘은 파랗고 땅은 붉었다.

그리고 자당화는 고왔다.

1273년 4월


최후의 일인이 목숨을 던진 그날 자당화가 곱게 피었던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전면에 화분 세 개가 걸려있고, 벽엔 예쁜 수국 그림과 함께 글이 적혀 있다.

그들은

무신정권의 버팀목이었고

역사의 승자에게는 반역의 무리였다.

그들은

새로운 고려를 꿈꾸기도 했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용감한 군대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전란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던

고려의 백성이었다.

 

토성을 걷다 만난 작은 슬레이트 건조물과 벽화

 

이름 없는 용사들은 역사의 기록에 오르지 못한다. 그들은 아주 머나먼 섬나라에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넋이 되었고, 누구 하나 수습해 줄 이 없는 곳에서 돌아가지 못하는 넋이 되고 말았다. 시신이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을 곳, 그러나 세월은 그 모든 것을 감추고 있다.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비장한 느낌이 들면서도 왜 거북한 느낌이 드는지를 생각했다.

그들이 고려의 백성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용감한 군대라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뿐. 그 어디에도 탐라민의 희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여몽연합군에 의해 삼별초가 평정되자 몽골은 대놓고 탐라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일본과 남송을 정벌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탐라만큼 좋은 조건을 갖춘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탐라인들을 동원하여 전투마와 전선을 준비한다. 명에 의해 원이 멸망한 뒤에도 그들은 최영 장군의 부대에 의해 섬멸될 때까지 온갖 횡포를 부린다. 결국 삼별초는 원이 탐라를 지배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닐까. 이 땅의 주인은 탐라민인데 기록의 중심에는 늘 삼별초만 등장한다. 어째서 제주인은 투명인간이 되어야 하나.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제주도민으로서는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생각이 자꾸 여릿해지는 바람에 머리를 털고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엔 천 년 구름만 무심히 흐르고 화사한 들꽃 사이에는 한 무리의 올레꾼들이 걸어가고 있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