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청원 게시판이 특정 인물에 대한 성토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이코리아] 국민 청원제도가 당초 취지와 달리 분노의 배출 창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최근 청와대 국민게시판에 쏟아진 ‘김보름 박지우 선수 자격 박탈’ 청원이나 정형식 판사 감사 청원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성이 아닌 감정 논리에 치우친 이런 사례들은 ‘광장민주주의의 폐해’를 낳아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에 청와대는 소통창구로서 장점을 견지하되 역기능에 대해서는 개선책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당초 국민청원 게시판은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모토 아래, 국민과 정부의 거리감을 줄이고 국민으로부터 직접 사회적 문제의 개선 아이디어를 듣겠다는 취지로 개설됐다. 실제로 지난 1월 16일 청와대는 약 28만명이 참여한 ‘권역외상센터 지원’ 청원에 대해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송체계, 외과의 수련과정, 인력충원, 예산배분 등 다양한 부분을 검토하겠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받아온 응급의료시스템의 개선이 국민청원을 통해 탄력을 받게 된 긍정적인 사례다.

◇ 국민청원이 아닌 성토의 장으로 변질

하지만 최근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주로 특정 단체나 인물에 대한 고발성 청원이 가장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여자 팀추월 준준결승에서 문제를 일으킨 김보름·박지우 선수의 대표자격을 박탈해달라는 국민청원은 지난 19일 게시된 이후 3일 만에 56만명의 참여인원을 모았다. 현재 추세라면 세 달간 60만명 이상이 참여한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의 기록도 갱신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밖에도 정형식 판사에 대한 특별감사 청원 24만9706명, 나경원 의원 평창올림픽 위원직 파면 청원 36만905명, 연극인 이윤택씨의 성폭행 진상규명 청원 12만9221명 등 청원 게시판 상위목록에는 특정 인물의 잘잘못을 가려달라는 청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중에는 실제 조사가 필요하지만 미진했던 사례도 존재하나, 과도한 여론의 쏠림 현상으로 인민재판에 가까운 청원이 게시되는 부작용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당장 김보름·박지우 선수만 해도 정치인이나 기업인처럼 사회적 파급력이 크거나 강력 범죄를 저지른 사례도 아니지만, 그 어떤 청원보다 빠른 속도로 비난 여론이 몰리고 있다. 이 밖에도 전 체조 국가대표 손연재 선수에 대한 검찰조사 요구, 배용준·박수진 부부 중환자실 특혜 의혹 조사 요구 등 그때그때의 사회적 이슈에 따라 특정 인물에 대한 청원에 과도한 관심이 집중된 사례는 다수 발견된다.

◇ 정부 권한 넘어선 청원 많아

또한 정부의 권한을 넘어선 청원도 다수 제기돼 청와대도 곤란을 겪고 있다. 사법부나 입법부가 결정해야 할 문제를 청와대가 해결해달라고 할 경우 적정 수위의 답안을 찾아야하기 때문. 예를 들어 최근 청와대는 정형식 판사에 대한 특별감사 청원에 대해 “청와대가 그럴 권한은 없고, 파면이 가능하려면 직무집행에서 헌법 및 법률 위반사유가 있어야 한다”며 “청원내용은 법원행정처에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자칫 잘못하면 정부가 사법부에 관여한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만큼, 원론적 답변을 제시하는데 그친 것으로 풀이된다.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이나 청소년 보호법 폐지, 낙태죄 폐지 청원 또한 청와대 권한 밖의 문제다. 재심으로 통해 무기징역을 선고하라는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은 현행 사법제도의 주요 원칙을 아예 뒤바꾸지 않는 한 불가능한 조치다. 청소년 보호법이나 낙태죄 또한 사법부가 판단하고 입법부가 개정할 문제로, 청와대가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 실명제, 비동의 기능 요구

이러한 현상 때문에 전문가들은 국민청원 게시판의 부작용을 지적하며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최장집 명예교수는 지난해 11월 한 강연에서 ‘소년범을 무겁게 처벌하라’, ‘여성도 군대 보내라’ 등 깊은 논의가 필요한 이슈를 즉흥적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며 “(여론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 차분한 숙의 과정을 건너뛰게 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여론에 따라 시의적 주제에 관심이 집중되다보니 중요성이 떨어지거나 극단적인 주장이 청원 게시판을 채우게 된다는 것.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김석호 교수도 SBS와의 인터뷰에서 “극단적인 목소리나 이해타산에 근거한 목소리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국민 청원제가 악용될 수 있는 소지는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객관적 판단보다 여론의 흐름에 좌우되고 있는 국민청원의 부작용이 더 악화된다면 청와대에도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국민청원 게시판을 실명제로 전환하고,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는 청원에 대한 비동의 기능을 추가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 靑, 순기능 유지하되 개선책 모색

반면 청와대는 국민청원 게시판의 순기능에 더 주목하는 모양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이 많이 접수됐다. 현행 법제로는 수용이 불가능해 곤혹스러운 경우도 있지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며 현행 국민청원 시스템을 유지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에게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청원이라도 장기적으로 법제를 개선할 때 참고가 될 것이다”라며 “어떤 의견이든 참여인원이 기준을 넘은 청원들에 대해서는 청와대와 각 부처에서 성의 있게 답변해 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문재인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해왔던 만큼 국민청원 게시판의 시스템을 재편하거나 폐지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고려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노컷뉴스가 지난해 11월 보도한 바에 따르면, 청와대는 실명제 및 비동의 기능 추가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소수의 악플러를 잡기위해 모든 국민에게 실명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는 것”이라며 “비동의 기능을 추가할 경우 청원게시판이 토론게시판으로 바뀔 수 있다”고 밝혔다. 실명제와 비동의 모두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는 국민청원 게시판의 기존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뜻.

실제로 대부분의 부적절한 청원은 참여인원 저조로 사전에 걸러지는데다, 청와대 권한 밖의 청원이라도 제도 개선의 아이디어를 제공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현행 청원제도의 유지를 바라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계속해서 국민청원 게시판이 특정 인물에 대한 성토의 장으로 변질되는 모습을 보일 경우 청와대의 고민도 점차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당장 청와대가 김보름·박지우 선수의 대표자격 박탈 청원에 대해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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