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조각가 존 배(76)는 견고하게 용접한 철사에 음악적 선율을 얹힌다.

수학적이고 건축적인 조형미가 느껴지는 그의 조각이 음악적이고 무용적 율동감을 지닌 것은 가정환경의 영향이 크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누나 때문에 집에서는 항상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철학자로 사는 형의 어릴 적 꿈은 오페라 가수였고, 어머니는 자장가로 러시아 민요를 들려줬다.

색소폰 연주에 매료된 존 배는 무용에도 관심을 보이며 뉴욕 시티 발레와 마사 그레이엄의 모던 댄스 그룹, 볼쇼이 발레단 등을 체험했다. 자신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예술가로 바흐를 꼽는다.

배씨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 작품을 들여놨다. 2006년 개인전 이후 7년 만의 국내 개인전으로 신작 20점을 내놨다.

고령에도 재료 선택부터 용접에서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혼자 해낸다. 자신의 작업 과정을 재즈음악가의 즉흥 연주에 비유한다. “조수나 동료 누군가가 대신 그 곡을 연주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면서 특히 “즉흥 연주는 연주가에 따라 곡이 달라지고 어떻게 끝이 날지 모른다”며 “내 조각도 매순간 우연한 선택에 따라 형태가 결정되고 탄생하므로 전 과정을 홀로 해내고 있다”고 전했다.

작품이 언제 어느 시점에서 끝이 날지 모르지만, 개의치 않는다. 과정 자체를 즐긴다. 이 때문에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데 2~3년이 걸리기도 한다. “결과물 자체보다 내가 직접 작업을 하는 과정들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면서 “작업 안에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느냐가 그 작가를 정의한다”고 강조했다.

존 배는 열두 살이던 1949년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에 힘쓴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배민수)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 6·25가 발발하자 부모는 존 배를 미국에 두고 구호활동을 위해 귀국한다. 미국에 홀로 남겨진 존 배는 미술에 소질을 보여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 4년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다. 27세 때인 1965년 이 대학에 신설된 조각과 최연소 학과장을 맡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영원한 순간’과 ‘원자의 갈비뼈’ 등에서는 무수한 선이 무작위로 휘어 형성된 기형적 육면체를 만들었다. 2008~2011년 작가가 선보인 정육면체를 변형한 작품의 연장선에 있다. ‘철 무지개’와 ‘믿음의 도약’ 등은 직선적 형태를 바탕으로 했고 ‘기억의 은신처’나 ‘선택, 선택’은 곡선들을 합쳐 만들었다.

가끔 작업계획을 세우거나 드로잉을 했는데 몇 년 동안은 드로잉 작업을 아예 하지 않았다. “용접작업 자체가 3차원적 드로잉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그 드로잉 작업이 어떤 작품으로 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기억의 은신처’란 제목으로 4월25일까지 볼 수 있다. 02-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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