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업무개시명령 규탄하는 화물연대 조합원들 = 뉴시스
30일 업무개시명령 규탄하는 화물연대 조합원들 = 뉴시스

[이코리아] 최근 화물연대 파업과 관련, 1981년 미국에서 일어난 PATCO 파업에 대한 레이건 대통령의 대응이 주목받고 있다.

1981년 미국 항공관제사 노동조합 ‘PATCO (Professional Air Traffic Controllers Organization)’의 파업 당시 정권 초기였던 레이건 대통령은 파업 중이던 1만 1000여 명 전원을 해고하고 재취업 자격을 박탈했다. 재계에서는 윤 대통령도 이처럼 불법 파업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윤 대통령이 29일 화물연대에 업무 개시 명령을 내리고, 강경하게 대응하는 태도가 레이건 대통령과 유사하다는 보도도 있었다.

교통관제사 파업에 대해 연설하는 레이건 대통령 = 로널드 레이건 박물관 누리집
항공관제사 파업에 대해 연설하는 레이건 대통령 = 로널드 레이건 박물관 누리집

1981년에 일어난 PATCO 파업의 배경과 이번 화물연대 파업과의 차이점을 살펴봤다.

미국의 모든 항공관제사는 1936년 항공 상무국이 설치되며 연방법의 규율을 받는 연방 공무원의 신분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항공관제사의 열악한 근무환경은 60년대부터 지적되기 시작했다.

60년대에 항공산업은 급격하게 발전했지만, 미국의 관제사들은 노후화된 장비와 과도한 업무량 등 열악한 근무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관제사들은 업무환경 개선과 임금 상승을 요구했지만, 연방정부는 이런 요청을 계속 무시했다. 

미국의 법률 체계는 공무원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어 관제사들은 연방항공청과 교섭할 합법적인 수단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따라 1968년에 관제사들의 노동조합 PATCO가 결성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미국의 경제 불황이 이어지며 노동조합의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들고, 공무원의 노동조건도 약화 되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공무원의 임금 인상을 거부했고 이런 기조와 맞물려 항공관제사들의 복지도 축소되었다.

카터 정부에 실망한 PATCO는 낡은 관제 장비의 교체, 관제사의 노동시간 감축 및 인력충원, 임금 교섭권 허용 등이 포함된 6가지 개선안을 레이건 대선 캠프에 요구했다. 레이건 캠프는 PATCO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혔으며, 공개적으로 항공관제사의 임금 인상을 약속했고 PATCO는 레이건 후보를 지지했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에도 관제사에 대한 처우가 나아지지 않자 81년 8월 3일 PATCO는 파업에 돌입했다. 더 나은 근무환경과 임금 인상, 주 32시간 근무를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당시 전국의 항공관제사 1만 6천여 명 중 80%에 달하는 1만 3천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파업이 시작된 지 4시간 만에 성명을 통해 48시간 내 복귀하지 않는 관제사를 해고하겠다고 선언했고, 8월 5일에 복귀하지 않은 1만 1300명의 관제사를 해고했다.

연방항공청은 78년부터 PATCO가 파업 자금을 조성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파업에 대비할 ‘비상 대책’을 세워두고 있었다. 다수의 관제사가 파업으로 자리를 비우면 항공로를 재설정하고 항공사들과 협조하여 운항 편수를 조절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 ‘비상 대책’의 실행을 지시했고, 연방항공청은 군 항공관제사, 전직 관제사 등 인력을 총동원해 파업 1주일 만에 이전 수준의 항공 교통량이 회복되었다. 

레이건 정부는 언론을 통한 여론전에도 주력했다. 교통부 장관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PATCO 파업은 수십억 단위의 경제적 피해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항공청장은 “관제사 한 명을 육성하는 데 16만 달러가 소모된다.”라고 발언하는 등 여론을 주도하기 위한 선전을 이어나갔다.

정부가 제한적인 임금 인상을 약속했지만, PATCO가 그 ‘관대한 제한’을 거절했다는 여론이 퍼지며 조세 부담을 우려한 시민들 역시 PATCO 파업에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게다가 PATCO는 우호적인 관계였던 조종사노조나 다른 분야 공무원들의 지지를 얻어내지도 못했다.

시민과 공무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PATCO의 파업은 레이건 정부에게 정치적 기회가 되었다. 파업 참가자 전원을 해고한 레이건 대통령은 교섭을 중단하고 강경한 대응을 취하며 노동조합의 불법 파업과 타협하지 않는 강경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파업이 실패한 PATCO는 81년 8월 교섭대표 자격이 박탈되어 법외노조가 되었다가 다음 해 7월 해산되었다. 파업 당시 해고당한 관제사들은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이 이를 풀어줄 때까지 항공 분야 재취업을 금지당했다. 현재 PATCO 사태는 미국 노사관계의 우위가 역전된 중요한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28일 첫 교섭을 위해 만난 화물연대와 정부 관계자 = 뉴시스
28일 첫 교섭을 위해 만난 화물연대와 정부 관계자 = 뉴시스

공무원 신분의 관제사들로 이루어진 PATCO 파업과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물연대 파업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정부는 화물연대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개인사업자인 화물기사의 집단운송 거부를 불법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도 나오며 이번 파업에 대한 찬반 여론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파업이 얼마나 호응을 얻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1981년 PATCO 파업 당시 설문조사에서 59%의 응답자가 레이건 대통령의 조치에 찬성했고, 68%의 응답자가 항공관제사의 불법 파업에 반대했다. 또한 22%의 응답자만이 레이건이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응답했다. 당시 PATCO의 파업은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다.

= 옥소폴리틱스
= 옥소폴리틱스

2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정치 데이터 플랫폼 옥소폴리틱스에 따르면 화물업계 최저 소득 보장에 39.3%가 찬성하고, 41%가 반대해 찬반이 비슷하다. 안전운임제의 확대에는 58.2%가 찬성하고 있다. 현재 화물연대는 81년의 PATCO보다는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양진우. "미국 항공관제사노조 PATCO 파업에 관한 연구." 국내 석사학위 논문 성균관대학교, 2017.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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