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전 언론인
임순만 전 언론인

[이코리아] 사람들은 누구나 변화를 추구한다. 도전하지 않는 삶은 굴곡의 깊이와 성취의 기쁨을 누리기 어렵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새로움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나를 찾아 어려움을 헤치고 나서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동안 벽 앞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가슴을 열고 생애를 건 도전에 나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 장애우 단체에서 독서토론을 했다. 우리가 읽은 텍스트는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 겨울날 자신을 던져 어려운 이웃에게 생명의 희망을 선물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참석자들과 한 문단씩 돌려가며 읽은 후 서로의 소감을 이야기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밤, 자신의 폐렴을 돌보지 않고 담쟁이 잎새 그림을 그린 후 사다리를 놓고 담에 부착하느라 상태가 악화 돼 죽은 베어먼 노인의 행동을 토론할 때 한 장애우가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에서 마음이 가장 좋은 것으로 나오는 수는 친구 존시에게 수프를 끓여주고 최선을 다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러나 술주정뱅이 베어먼 영감은 수를 위해 자신의 폐렴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바쳐 헌신한다. 악한에게도 다른 사람을 돌봐주고 싶은 심리는 있다. 이런 점이 인간을 깊이 있게 만드는 것 같다.”

실내가 조용해졌다. 그는 이어 “베어먼 영감이 평소 과장되게 행동했던 것은 자신의 꿈을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의 억압된 욕망이 반영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과잉행동을 하고 큰소리치는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런 의견 때문인지 폐렴 환자가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 밖에 나가서 한 행동이 바보 같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중도장애우들은 과거 비장애인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떠나기 어려워했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건강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뜻하지 않은 불운한 사건으로 인해 중증 신체적 장애를 갖게 됐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이런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까. 그 오랜 불면의 세월로부터,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까마득한 절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 중 나이 든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장애를 입은 이후 거울을 잘 안 보고 지내왔다. 그런데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고 자문을 해보니 자화상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자화상을 그리자면 거울과 내 사진을 자주 들여다봐야 하는데, 이제 와서 거울 속의 나를 보면 생소한 느낌이 들 것 같다.” 그는 왜 자화상을 그리고 싶으냐는 질문에 “사람의 얼굴 속에는 자신이 몰랐던 부분이 들어있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며칠 후 그분을 다시 만나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려서 소아마비로 다리를 거의 쓰지 못하던 그는 35년 전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와 충돌해 손마저 심하게 다치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목각공예를 하면서 살았고, 디자인과 도안에 상당한 솜씨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다리를 못 쓰는 왼손잡이인 그가 왼손까지 못쓰게 되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손마저 중도 장애를 입었으니 오랫동안 절망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더 이상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싫었다. 그렇게 살아왔던 그가 이제 거울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미술사에서 유명한 자화상 그림을 많이 알고 있었다. 윤두서의 자화상과 반 고흐의 자화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그는 “이들 자화상의 세밀한 터치에는 삶의 치열한 내면이 들어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놀라운 설명이었다. 그는 한 가닥의 붓 터치를 삶의 한 장(章)으로 보는 깊은 통찰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자화상에 도전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처지를 담담히 수용하고, 자신의 현재를 객관화시켜 마주할 수 있는 준비를 갖췄다는 말로 들렸다. 원망과 억울함과 분노와 체념과 절망을 잠재우고,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세밀히 들여다보면서 그 미세한 주름 하나하나를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 그가 지나온 계곡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가늠이 되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왔다고 했다. 복지관에 나가서 인물화 기초과정을 배웠다. 그가 좋아하는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 사진을 확대해놓고 복제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은 그리지 못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얼굴을 진솔하게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자신의 자서전을 쓰는 것과 유사한 작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는 거동이 매우 어려운 그는 도화지를 사오는 일부터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가 도화지를 사오는 것은 첫 손주의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가방을 사오는 할아버지의 꿈만큼이나 위대하게 보였다. 그는 우선 도화지와 스케치용 그림연필과 색연필을 구입하겠지만, 점차 수채물감과 오일을 구입하고, 점점 더 화폭이 큰 자화상을 제작하게 될 것이다. 그는 첫 자화상을 완성하는 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한 탈북여성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여행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받아보는 한 잡지의 유능한 기자였다. 그 잡지의 주요 기사는 상당수 그녀가 쓴 것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고정 독자였다. 격월로 발간되는 그 잡지에 그녀의 기사가 실리지 않고, 기자명단에도 이름이 나와 있지 않아 연락을 했다. 통화에서 그녀는 여행 프리랜서 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기자직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이 거의 없는 탈북민이 직장도 그만두고 여행길에 오르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동안 나는 남한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생활하려고 노력해왔다. 이곳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모방하려 했고, 남한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십 몇 년을 지내다가 어느 날 나는 그것이 나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평생을 쫓아가도 남한사람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왜 여행길에 나서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외부 세계로 나가는 것은 어려서부터 나의 간절한 꿈이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명문대학을 다니다가 조부모님의 선택에 따라 1970년대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에 들어간 간 귀국자였다. 아버지는 ‘째포’라고 불리며 차별대우를 받았고, 여행증이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는 북조선에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절망 속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외부 세상을 꿈꿨던 나는 밥을 찾아 탈북을 했고, 어렵게 이뤄진 2019년 유럽 배낭여행에서 오래 전에 품었던 꿈이 사라지지 않고 소나무처럼 가슴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여행작가가 되기 위해 준비를 했다.”

삶에 의욕을 잃은 그녀의 아버지는 고혈압, 뇌졸중, 간경화 등 온갖 병을 달고 살았다. 어느날 그녀의 아버지는 딸과 함께 바닷가에 갔다가 구름과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가도 가도 이 길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아버지의 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그녀는 그로부터 20년 후 청진 앞바다를 닮은 속초 바닷가에서 아버지의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원망과 미움과 그리움이 배어있는지를 깨달았고 “아버지가 울던 바다”라는 여행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다.

그녀의 유튜브는 남들처럼 멋진 풍광과 여행지에서 만드는 음식의 맛과 커피 향을 이야기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동영상에는 증조부 때부터 고향을 떠나와 먹고 살 곳을 찾아 헤매는 코리안 엑소더스의 역사과 향수가 가득 담겨있다. 자신의 꿈의 원천을 찾아내기 위해 강원도 고성에서 시작해 정선 가을 들국화의 향기에 취하고, 평창 천년의 숲을 지나, 철원 옛 고구려의 꿈을 들여다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들에게 여행으로의 권유는 한가한 일탈이나 한때의 낭만 정도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답한다. “오랫동안 억눌려온 사람들에게 여행은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고, 그 지점에서 나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된다. 여행을 통해 자유와 삶과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다. 송지호 해안 서낭바위 위의 한 그루 소나무를 보고 나는 도시로 돌아온다.” 

임순만 작가 ·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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