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원정연.
사진, 원정연.

 

가까운 것일수록 잘 보이던 것이
이제는 멀수록 잘 보인다.

책 속의 글이나 컴퓨터 자판 같은 것보다

달음도 얼마쯤 해야 하는
들이며, 산이며, 구름 같은 것들이
잘 보인다.

한 발치의 것보다
두 발치의 것
앞의 찬란한 것보다
뒤의 그윽한 것
꽃의 색보다 꽃의 향기 같은 것
― 이런 것들이 잘 보인다.

원시는 
가까운 것에 눈멀고
먼 것에 눈 뜨는 것이니

이제는 가까운 것들을
조금씩 멀리 놓아 줄 때이다.

직장 생활을 할 때 돋보기로 책을 읽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돋보기로 더듬듯이 한 자 한 자 읽던 그분을 보면서 나도 언제쯤 그리될까 생각했지요.

가까이 있는 게 잘 보이고 선명했는데 언제부터인지 흐릿해졌습니다. 바늘귀를 찾는 것은 이제 어림도 없어졌습니다. 작고 섬세한 것들은 보는 것은 겁부터 납니다. 사전 같은 작은 활자는 돋보기부터 찾습니다. 핸드폰 글자도 크게 확대해 놓습니다. 책을 조금만 봐도 눈이 쉬 피로해집니다. 

먼 데 있는 것은 잘 보이나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 눈이 원시遠視입니다. 이쯤 나이가 들면 가까이 있던 잡다한 물건이나 일, 항상 가까이서 괴롭히던 사념이나 잡념들을 보지 말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보지 말고 버리거나 뛰어넘으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좀 더 멀리 있는 ‘들이며, 산이며, 구름’이 잘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우리에게 원시를 준 자연의 섭리겠지요.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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