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 사진=페이스북 갈무리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 사진=페이스북 갈무리

엘살바도르가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사용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암호화폐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암호화폐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며 기대감이 확산되고 있지만, 암호화폐의 법정통화 사용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은 지난 5일(현지시각)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비트코인 2021 컨퍼런스’에 화상으로 참석해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하는 내용의 법안을 다음 주 의회에 제출하겠다고 발표했다. 부켈레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여당이 국회의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한 만큼,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높다.

◇비트코인으로 '脫 달러' 추진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사용하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엘살바도르는 지난 2001년 통화 통합을 추진한 뒤부터 자국이 발행한 법정통화 없이 미국 달러에 의존하고 있다. 실제 대외 거래 대부분을 미국에 의존하는 카리브해 국가들이나 산유국들은 달러를 사용하거나 자국 통화를 달러에 연동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엘살바도르의 통화통합 조치가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시작된 이후부터다. 경제위기로 미국이 극단적인 양적 완화를 추진하면서 달러 공급이 크게 늘었고, 자국 통화시스템이 없는 엘살바도르는 화폐 가치 하락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됐다. 포브스가 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M2(광의통화량)는 지난해 2월 15.35조 달러에서 올해 5월 20.26조 달러로 32%나 급증했는데 이처럼 급격한 통화량의 증가는 미국 역사상 처음이다. 

포브스는 “연준의 특별 조치로 미국 금융기관, 주식시장 및 여러 경제 분야에 현금이 공급된 반면, 엘살바도르 은행은 연준으로부터 달러를 공급받지 못했다”며 “미국 통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엘살바도르의 구매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부켈레 대통령도 화상회의에서 “미 연준과 같은 중앙은행들이 더 많은 조치를 시행하고 있으며, 이는 엘살바도르의 경제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며 “중앙은행들의 부정적 영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중앙은행도 공급을 통제할 수 없는 디지털 통화의 유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트코인은 개발 당시 향후 100년간 2100만개가 공급되도록 설계돼 전체 사용자의 합의 없이는 이를 변경할 수 없다.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심각하게 낮는 금융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엘살바도르의 계좌 보유율은 은행 29%, 모바일 머니 서비스 4%로 국민 10명중 7명이 계좌 없이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개발도상국 평균이 63%(세계은행 기준)임을 고려하면, 엘살바도르의 금융접근성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금융인프라가 부족한 개발도상국에서 은행에서 계좌를 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계좌가 있다고 해도 해외 송금에 의존하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에게 높은 송금 수수료나 며칠씩 걸리는 송금 기간 등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엘살바도르는 디지털지갑 기업인 ‘스트라이크’와 협력해 비트코인 유통을 위한 금융인프라를 구축하고 금융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계획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의 평균 계좌 보유율은 2017년 기준 63%이다. 엘살바도르는 그 절반인 30% 수준으로 알려졌다. 자료=세계은행
세계은행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의 평균 계좌 보유율은 2017년 기준 63%이다. 엘살바도르는 그 절반인 약 30% 수준으로 알려졌다. 자료=세계은행

◇ 대통령-갱단 거래 의혹, 자금세탁 문제는?

물론 부켈레 대통령의 비트코인 실험에 대해 장밋빛 전망만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일부 전문가 및 해외 경제매체들은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 실험에 대해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암호화폐 컨설턴트 엘로이사 마르케소니는 8일 포춘(Fortune)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조치가 빈곤율이 매우 높은 엘살바도르에게 도움이 될지 회의적이다”라며 해외 송금 의존도가 높은 엘살바도르에게 변동성이 큰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사용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마르케소니는 이어 “부켈레가 준비 중인 법안으로 인해 비트코인이 자금세탁에 활용되는 사례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 전문가들이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 실험에 대해서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자금세탁 문제다. 스웨덴 산업경제연구소(RIIE)의 로저 스벤손 교수는 8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기고한 글에서 “암호화폐의 대중성은 부분적으로 비트코인 지갑 소유자의 익명성 때문이다. 거래 자체는 식별할 수 있어도, 제3자가 거래 당사자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며 “이 때문에 범죄자와 자금을 세탁하려는 사람들에게 암호화폐가 인기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스벤손 교수는 이어 “다른 이들은 암호화폐를 투자 수단으로 보지만, 교환이나 가치저장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충족하지 않고 발행인도 없는 암호화폐에 안정적인 가치는 없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부켈레 대통령은 범죄조직과의 거래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부켈레 대통령은 치솟는 살인율을 낮추기 위해 지난해 대형 범죄조직 MS-13(마라 살바트루차)와 협상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해당 조직에 교도소에서의 특혜 등을 제공하고, 범죄조직은 선거에서 부켈레 대통령이 속한 여당을 돕기로 했다는 것.

부켈레 대통령은 의혹을 부인하고 있지만, 정부와 범죄조직의 밀월관계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암호화폐의 법정통화 승인은 심각한 자금세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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