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금융감독원
4대 시중은행 점포 현황. 자료=금융감독원

은행권이 연말을 맞아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코로나19와 저금리, 비대면 거래 활성화에 따른 불가피한 움직임이지만, 금융 취약계층의 불편이 커지고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부작용 때문에 우려 또한 높아지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은 이달 21일 각각 점포 22개, 19개를 인근 점포로 통폐합한다. 지난달 12개 지점을 폐쇄한 하나은행 또한 같은 날 추가로 6개 지점의 문을 닫을 예정이다.

은행권의 점포 축소 흐름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015년 기준 7278개였던 은행 점포(지점+출장소) 수는 올해 6월말 기준 6586개로 9.5% 감소했다. 특히 국민·신한·우리·하나 등 4대 은행의 감소세는 더욱 뚜렷하다. 같은 기간 4대 은행 점포 수는 3924개에서 3430개로 12.6%나 줄어들었다. 5년 동안 약 500개에 가까운 점포가 문을 닫은 셈이다.

점포 수가 줄어드는 만큼 인원 감축도 병행될 수밖에 없다. 하나은행은 지난 17일, 15년 이상 근무한 만 40세 이상 일반직원을 대상으로 정례 특별퇴직 신청을 받는다고 밝혔다. 우리은행 또한 16일부터 만 54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농협은행은 이미 지난달 말 총 503명의 특별퇴직 신청을 접수했다.

 

자료=한국은행
자료=한국은행

◇ 은행권이 몸집 줄이기 나선 이유

은행권이 몸집 줄이기에 나선 배경에는 코로나19에 따른 비용 절감 노력과 함께, 비대면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창구 거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이 놓여있다. 모바일·인터넷 뱅킹 비중이 높아지면서 기존 대면 거래에 필요했던 인력과 점포를 줄여 조직을 개편하고 은행권의 당면 과제인 ‘디지털 전환’에 집중해야할 필요성이 높아졌다는 것. 

실제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6월중 인터넷뱅킹을 통한 은행업무 처리 비중은 무려 64.3%로 지난해 말(59.3%)보다 5%p 상승했다. 반면 창구 거래 비중은 7.4%로 오히려 0.5%p 감소했다. 은행이 제공하는 금융서비스 10건 중 1건도 창구를 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송금서비스로 범위를 압축하면 이러한 흐름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이 금감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상반기 18억6300만건의 은행 송금 거래 중 창구를 통해 이뤄진 경우는 1400만건(0.75%)에 그쳤다. 이는 지난 2015년(2.12%)에 비하면 3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대면 거래에 필요한 자원을 줄이려는 노력에는 점포와 인력뿐만 아니라 ATM도 포함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2013년 7만개가 넘었던 은행권 ATM은 지난해 5만5807대로 줄어들었다. 6년 동안 총 1만4298대가 줄어든 것으로 연 평균 2383대의 ATM이 사라진 셈이다. 

 

자료=한국은행
자료=한국은행

 

◇ 줄어든 창구, 금융 취약계층 불편 가중

은행권의 몸집 줄이기가 디지털 전환과 경영 효율화를 위해 불가피한 움직임이라지만, 금융업이 가진 공공성을 고려할 때 마냥 점포 폐쇄 흐름을 놔둘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면 거래 창구가 줄어들수록 모바일·인터넷 뱅킹에 익숙하지 않은 금융 취약계층의 불편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영국의 경우 현금 사용 비중이 줄어들면서 상업은행들이 현금 취급 비용을 줄이기 위해 다수의 지점과 ATM을 폐쇄했다가 문제가 된 바 있다. 영국의 상업은행 지점 수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무려 23.4%나 급감했는데, 이 때문에 고령층 및 벽지 거주자들이 금융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워지면서 불만이 고조됐다. 

결국 영국 정부는 은행 지점이 폐쇄된 지역 주민들이 우체국을 통해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하는 한편, 향후 은행 지점 및 ATM 폐쇄 시 당국에 보고하고 소비자 영향 평가를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했다. 은행이 ‘효율성’만을 고려해 점포 수를 줄이도록 허용하면 금융업이 가진 ‘공공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금융정의연대,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이 4일 기자회견을 열고 은행권의 점포 폐쇄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참여연대, 금융정의연대,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이 4일 기자회견을 열고 은행권의 점포 폐쇄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 노동계, "무분별한 점포 축소, 금융소비자 기만 행위"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은행의 점포 폐쇄 및 인원 감축 등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애초에 은행이 점포를 신설·폐쇄하려면 금융당국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난 1998년 은행법 개정으로 인해 은행 자율에 맡겨지면서, 현재는 금융당국이 별다른 개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 지난 2017년 씨티은행의 대규모 점포 통폐합이 이슈가 됐을 때도 금융위원회는 법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 금융위 은행과장을 맡고 있었던 김진홍 금융그룹감독혁신단장은 국회 토론회에서 “현행 은행법상 점포 통폐합 등 은행 채널관리 관련 사항은 원칙적으로 조치 권한이 없다”며 “현행법이 아니더라도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점포 축소 추세가 점차 빨라지면서 금융당국도 대응에 나서는 분위기다. 실제 금융감독원은 지난 7월 은행 점포 폐쇄 현황에 대한 전수조사에 착수하며 관리·감독에 나선 바 있다. 금융위 또한 지난 8월 발표한 ‘고령친화 금융환경 조성방안’을 통해 ▲점포 폐쇄 3개월 전 고객에게 통지하고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지점폐쇄 영향평가를 시행하며 ▲이동·무인점포 등 대체창구를 충분히 공급하도록 했다. 

시민단체와 노동계도 또한 은행권의 점포 축소 움직임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참여연대, 금융정의연대,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은 지난 4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은행들의 영업점 축소는 디지털금융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자 등 소외된 금융취약계층을 외면하는 행위”라며 “이는 은행의 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상황이 나은 은행들이 금융소외계층을 외면하고 효율성만 내세워 점포를 폐쇄하는 것은 금융공공성을 망각한 채 금융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라며 “은행들은 양질의 일자리와 금융소비자들의 권리까지 빼앗는 이기적인 행태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