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국민은행이 23일 '채용갑질' 논란에 휘말려 하루 만에 채용공고를 수정했다. 위가 처음 올라온 채용공고, 아래는 수정된 채용공고. 사진=KB국민은행 채용페이지 갈무리
KB국민은행이 23일 '채용갑질' 논란에 휘말려 하루 만에 채용공고를 수정했다. 위가 처음 올라온 채용공고, 아래는 수정된 채용공고. 사진=KB국민은행 채용페이지 갈무리

‘디지털 혁신’을 위한 인재 확보에 나선 KB국민은행이 무리한 채용공고로 논란에 휘말렸다. KB국민은행은 비판 여론에 부딪혀 하루 만에 채용공고를 수정했지만, 일자리가 목마른 취준생들을 상대로 ‘갑질’을 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계속되고 있다.

앞서 KB국민은행은 지난 22일 자사 홈페이지에 ‘2020년 KB국민은행 신입행원(L1) 채용 공고’를 게시했다. 공고에 따르면, 지원자들은 서류접수 시 ‘디지털 사전과제’를 함께 제출해야 한다. 국민은행의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중 하나를 골라 사용해보고 장·단점과 개선 방향 등을 담은 3~5쪽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것. 보고서 내용은 1차 프레젠테이션(PT) 면접에도 반영된다. 

접수 후에도 열흘 안에 총 24시간 분량의 디지털 교육과정(TOPCIT)을 이수해야 한다. 지원자들은 비즈니스 영역 19시간, 기술 영역 5시간의 교육을 이수한 뒤 AI 역량평가까지 마쳐야 한다.

취준생들은 서류전형도 통과하기 전에 무리한 과제를 요구하는 KB국민은행의 행태가 ‘갑질’과 다름없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취준생 커뮤니티 ‘독취사’ 회원들은 “국민은행 현역들도 버거워할 과제를 취준생한테 요구하고 있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에 이런 갑질은 정말 아닌 것 같다”며 국민은행 채용공고에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직장인들도 KB국민은행의 채용방침이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어떻게 저런 채용공고가 올라가도록 승인이 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국내 은행에 근무하는 익명의 회원은 “시중은행들은 특별한 차별점 없이 상대적인 브랜드파워와 로열티로 승부하고 있다”며 “그런데도 채용단계부터 자기 평판을 망가뜨리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 취준생 "2만명 아이디어 수집 의도" 비판

KB국민은행이 공개채용 절차에서 디지털 사전과제나 온라인 교육을 의무화한 유일한 시중은행은 아니다. 이미 신한은행은 지난해부터 일반직 채용에도 디지털 역량평가를 실시하고 있으며, 하나은행도 지난해 하반기 공채에서 디지털 사전연수를 도입했다. 

KB국민은행과 신한·하나은행의 차이는 지원자들에게 디지털 역량을 입증하라고 요구한 시점이다. 신한·하나은행은 모두 서류전형 통과자들을 대상으로 디지털 역량평가 및 사전연수를 실시했다. 반면 KB국민은행은 서류접수 과정에서 디지털 사전과제를 제출하도록 했고, 서류전형 통과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디지털 연수 및 평가를 받도록 강제했다.

일각에서 이번 채용공고를 두고 ‘아이디어 빼가기’ 논란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중은행 채용 경쟁률은 이미 수년 전부터 100대 1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KB국민은행은 시중은행 중 취준생 선호도가 가장 높은 곳이라는 점, 코로나19로 고용시장이 위축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올해는 경쟁률이 이보다 더 높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모집인원의 일정배수를 간추리기도 전인 서류전형에서 사전과제를 제출받는다면, 국민은행은 많게는 2만명 이상의 아이디어를 공짜로 수집할 수 있게 된다. 취준생들은 “아이디어가 필요하면 용역을 쓰라”며 거세가 반발하고 있다.

게다가 국민은행 모바일 앱의 개선방향을 분석해 보고서를 작성하려면 실제 앱을 설치·가입하고 계좌를 개설해야 한다. 채용공고가 아니라 영업공고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토스나 오픽처럼 흔한 영어평가 점수는 입력할 수 없도록 하면서 올해부터 독일어 점수를 기재하는 란을 추가한 점도 취준생들의 의심을 사고 있다. 취준생들은 “독일에 지점도 없으면서 독일어 점수는 왜 입력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영어는 부족하지만 독일어는 능통한 내정자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다. 

결국 KB국민은행은 거센 비난 여론에 급하게 채용공고를 수정했다. 23일 새로 올라온 채용공고에는 “디지털 사전과제는 1차면접 대상자에 한하여 제출”이라는 문구가 추가됐다.

KB국민은행이 지원자들에게 요구한 디지털 사전과제 내용 중 일부. 자료=KB국민은행 채용페이지
KB국민은행이 지원자들에게 요구한 디지털 사전과제 내용 중 일부. 자료=KB국민은행 채용페이지

◇ KB국민은행, ‘디지털 인재’ 집착하다 채용 무리수

KB국민은행이 채용과정에서 이처럼 ‘무리수’를 두게 된 배경에는 최근 은행권을 휩쓸고 있는 ‘디지털 혁신’ 열풍이 놓여있다. 

KB국민은행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시중은행은 디지털 인재를 따로 선발하는 것도 모자라 일반직 행원에게도 디지털 역량을 요구하는 추세다. 카카오톡, 네이버페이 등 모바일 친화적인 서비스를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금융시장에 안착하고 있는 빅테크 공룡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디지털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 금융사들이 빅테크와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하는 가운데, KB금융은 독자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자체 간편결제서비스 개발 보다는 카카오페이와 협업을 선택한 우리·하나금융과 달리 KB금융은 계열사인 KB국민카드를 통해 ‘KB페이’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KB금융의 자신감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 카카오뱅크, 토스를 제외하면 국내 뱅킹 앱 중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것은 KB국민은행의 ‘스타뱅킹’이다. KB금융이 빅테크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인 모바일 금융생태계를 구성하려면 디지털 인재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보수적인 은행권의 기업문화를 고려할 때 젊고 창의적인 디지털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글로벌 인적자원(HR) 컨설팅 업체인 유니버섬(Universum)이 2018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IT 전공자가 취업하고 싶은 회사는 대부분 대형 IT기업이었으며 금융사는 단 한 곳도 20위권 내에 들지 못했다. 

이 때문에 글로벌 은행들은 팀·조직 단위의 ‘인수채용’을 추진하는 등 기존 채용전략을 전면 수정하고 있다. 또한 창의적인 인재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경직된 금융권의 인사제도와 기업문화를 바꾸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실제 JP모건은 최근 연 단위 평가 대신 상시 피드백을 받는 방식으로 성과관리제도를 변경했고, 미쓰비시UFJ은행도 ‘탈연공주의’를 선언하며 성과 중심의 직무급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이번 KB국민은행의 채용공고 논란은 급변하는 금융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디지털 인재를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은행이 스스로 변하기 전에 지원자에게만 역량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강압적인 채용문화를 보고도 은행의 문을 두드릴 인재는 많지 않다. KB국민은행이 이번 논란을 딛고 새로운 채용문화를 제시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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