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이터 긴즈버그 전 미국 연방대법관이 2015년 조지타운대 강연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미국 PBS 방송화면 갈무리
루스 베이터 긴즈버그 전 미국 연방대법관이 2015년 조지타운대 강연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미국 PBS 방송화면 갈무리

‘위대한 반대자’, ‘악명높은 RBG’ 등으로 불리며 소수자 권리 보호에 힘써온 미국 진보의 상징,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사망한 지 닷새가 지났다. 지난 22일(현지시간)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난 긴즈버그는 수많은 명판결과 명언을 남기며 미국 현대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이코리아>는 긴즈버그가 남긴 명언을 통해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봤다.

◇ “뉴욕 가먼트 디스트릭트에서 일하는 경리와 연방대법관이 다른 점은 뭘까? 한 세대가 차이난다는 점이다” (2019년 애머스트칼리지 강연)

긴즈버그는 그의 어머니 셀리아 베이더 앰스터를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허곤 했다. 셀리아 앰스터는 15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오빠를 대학교에 보내기 위해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딸인 긴즈버그가 고등학교 역사 교사가 될 수 있도록 더 많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딸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식 하루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긴즈버그는 애머스트칼리지 강연에서 자신과 어머니의 삶을 통해 여성 인권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이야기했다. 긴즈버그는 “어머니와 나에게 주어진 기회가 얼마나 달랐는지는 바로 내 삶이 증언한다”며 “우리는 여성이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없었던 과거로 절대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머니보다 많은 기회를 받았다고 말한 긴즈버그지만 연방대법원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 법조계의 지독한 성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1959년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수석 졸업했음에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던 그녀는 교수들의 강력한 추천서 덕분에 겨우 재판연구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1963년 럿거스 대학에 교수로 임용될 때도 남성 교수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다.

긴즈버그가 젊은 시절 겪었던 차별을 생각하면, 어머니와 자신의 차이를 단지 “한 세대”로 축약한 겸양에 가깝다. 긴즈버그를 포함해 연방대법원에 여성에 세 명으로 늘어난 것은 그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긴즈버그와 같은 사람들이 차별과 싸워 세상을 바꿨기 때문이다.

◇ “반대의견은 미래의 세대에게 말하는 것” (2002년 미국 공영 라디오 NPR 인터뷰)

긴즈버그는 미국 사법계에서 진보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만큼, 수많은 판결에서 반대의견을 내왔다. 오코너 대법관이 은퇴하고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임명되기 전까지 홀로 대법원에서 여성의 자리를 지켰던 긴즈버그는 이 기간 동안 레드베터 사건, 곤잘레스 대 칼하트 사건 등과 관련해 꿋꿋하게 목소리를 대변했다.

릴리 레드베터가 오랫동안 근무해온 회사 ‘굿이어 타이어 앤드 러버’에 대해 남성과의 임금 차별을 이유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 긴즈버그는 레드베터의 손을 들어준 3명의 대법관 중 한 명이었다. 2007년 긴즈버그는 “법원은 여성이 임금차별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예 무관심한 것으로 보인다”며 기업을 지지한 대법관들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녀의 반대의견은 결국 레드베터를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2년 뒤 오바마 정부의 1호 법안인 ‘레드베터 공정임금법(Lilly Ledbetter Fair Pay Act)’으로 결실을 맺었다.

긴즈버그는 2002년 NPR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한 반대의견들은 곧 대법원의 의견이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배적인 관점으로 변하게 된다”고 소신을 밝혔다. 레드베터법은 긴즈버그의 신념이 현실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18일 세상을 떠난 루스 베이터 긴즈버그 전 연방대법관은 소수자 인권을 대변한 법조계 진보의 아이콘으로 미국 사회에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 사진=미국 연방대법원
지난 18일 세상을 떠난 루스 베이터 긴즈버그 전 연방대법관(앞줄 오른쪽 두번째)은 소수자 인권을 대변한 법조계 진보의 아이콘으로 미국 사회에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 사진=미국 연방대법원

◇ “출산은 여성 스스로 결정하는 것” (1993년 연방대법관 상원 인사청문회)

낙태 문제는 여성 대법관으로서 긴즈버그가 여러 차례 목소리를 내온 사회적 이슈 중 하나다. 1993년 인사청문회에서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받자, 긴즈버그는 “아이를 낳을지 안 낳을지에 대한 결정은 여성의 삶과 존엄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라며 “정부가 여성을 대신해 결정한다면, 여성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온전한 성인으로 취급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특히 긴즈버그는 지난 2007년 부분출산 낙태시술을 금지하는 연방법의 존속 여부에 대한 ‘곤잘레스 대 칼하트 사건’에서 강력한 반대의견을 냈다. 부분출산 낙태시술은 산모의 자궁에서 태아의 머리를 꺼낸 뒤 사망시키는 낙태법을 말한다. 반대론자들은 이 시술이 사실상 ‘영아 살해’에 해당하는 잔인한 행위라고 비난하는 반면, 찬성론자들은 감염 위험이 적고 산모에게 안전한 시술이라고 반박한다. 

특히 이 법안은 산모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낙태를 허용하는 예외조항마저 갖추고 있지 않아 논란이 됐다. 긴즈버그는 “다른 시술로는 생명이 위험해 부분출산 낙태시술 밖에 선택지가 없는 여성들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긴즈버그 또한 “부분출산 낙태시술 금지법이 정부의 이익을 증진한다는 믿음은 단순히 말해 비합리적”이라며 “대법원이 이 법안을 옹호하는 것은, 대법원 스스로 반복해서 선언한 권리를 깎아내리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했다.

◇ “9명 전원” (2015년 조지타운대 로스쿨 강연)

연방대법원에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나 있으면 충분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긴즈버그의 답변이다. 긴즈버그는 “사람들은 내 답변에 충격을 받곤 한다. 하지만 9명 전부 남성이었을 때는, 아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며 사법부의 뿌리 깊은 성차별에 대해 일침을 날렸다.

긴즈버그는 지난 1993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지명으로, 샌드라 데이 오코너에 이어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 됐다. 2006년 오코너 대법관이 은퇴한 뒤 2009년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기 전까지 3년간 긴즈버그는 홀로 대법관 내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긴즈버그가 떠난 지금 미국 연방대법원은 6명의 남성과 2명의 여성으로 구성돼있다. 대법관 9명 전원을 여성으로 채워야 한다는 긴즈버그의 발언은 사법부 내에서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것이 아직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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