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헌 금융감독원장. 사진=뉴시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 사진=뉴시스

DLF 사태, 라임 펀드 환매 중단 등 연이은 금융사고에도 불구하고 분쟁해결 절차의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금융사들이 금융당국의 배상 권고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분쟁조정기구에 강제력을 부여하는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1일 임원회의에서 “최근 사모펀드 연쇄 부실화로 금융산업 전체가 신뢰를 잃어가고 있어 안타깝다”며 “분쟁조정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편면적 구속력을 도입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편면적 구속력’이란 분쟁조정 결정에 대한 수용 의무를 금융소비자가 아닌 금융회사에게만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금융분쟁에서 법률적 조력을 구하기 어려운 금융소비자가 금융회사의 잘못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편면적 구속력은 이러한 비대칭을 바로잡기 위해 개입한 분쟁조정기구의 결정에 강제력을 부여해 금융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 금융사에 외면받는 분조위 권고

현재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이하 분조위)의 조정 결정에는 아무런 구속력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소비자에게 유리한 조정 결정을 내려도 금융회사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조정이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 

실제 윤 원장은 취임 후 외환파생상품 키코(KIKO) 피해기업에 대한 배상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은행들이 줄줄이 불수용 입장을 밝히면서 체면을 구긴 바 있다. 분조위의 배상 권고를 받은 신한·우리·하나·대구·씨티·KDB산업은행 등 6곳 중 조정안을 수용한 것은 우리은행 한 곳뿐이다. 우리은행을 제외한 5개 은행은 다섯 차례나 수용 결정을 연기한 끝에 결국 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이후 자율조정 문제를 다룰 은행협의체가 결정됐지만 지난달 8일 첫 회의가 열린 뒤 한 달째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 

물론 키코의 경우 지난 2013년 대법원이 사기 혐의가 없다고 확정판결을 내린 데다, 손해액 청구권 소멸시효인 10년이 지난 상태라 은행들도 나름 분조위 권고를 거부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키코와 달리 현재진행형인 금융분쟁의 경우에도 금융회사들이 분조위 조정 결정을 거부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삼성생명의 경우 지난 2018년 금감원으로부터 즉시연금 가입자 5만5천여명에 대한 미지급금 4300억원을 일괄지급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현재 소비자단체 등과 소송전을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금감원이 라임자산운용의 무역금융펀드 관련 분쟁조정 신청 4건에 대해 우리은행· 신한금융투자·하나은행·미래에셋대우·신영증권 등 판매사가 100% 배상하라고 권고했으나, 판매사들이 결정을 미루면서 지난달 27일이었던 답변기한이 1개월 연장됐다. 키코와 달리 시효도 지나지 않은 사건인 데다, 비교적 판매사 책임 소재가 분명한 사안임에도 조정 성립에 애를 먹고 있는 셈. 금감원은 선보상 시 자본시장법상 손실보전 금지 조항에 위배될 것을 우려한 일부 은행에 대해 향후 처벌하지 않겠다는 ‘비조치의견서’까지 전달했으나, 여전히 판매사들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라임 무역금융펀드 분쟁조정위원회가 열린 지난 6월 3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 앞에서 금융정의연대 회원들과 사모펀드 피해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라임 무역금융펀드 분쟁조정위원회가 열린 지난 6월 3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 앞에서 금융정의연대 회원들과 사모펀드 피해자들이 전액 배상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영국판 ‘키코’, 어떻게 해결했나?

이 때문에 금융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분쟁조정기구의 조정 결정에 구속력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실제 다수의 금융선진국들은 분쟁조정기구에 편면적 구속력을 부여하고 금융소비자 보호에 나서고 있다. 

예를 들어, 금융분쟁조정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언급되는 영국의 ‘금융옴부즈만서비스(FOS)’는 보상액이 15만 파운드(약 2억3천만원) 이하인 분쟁의 경우 금융회사에 편면적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는 10만 파운드(1억5천만원)였던 한도를 지난 2012년 상향해 금융소비자 보호의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또한, FOS는 3천명이 넘는 직원 중 2천명 이상을 조정인을 포함한 사건담당팀에 배치하는 등, 강제적인 분쟁조정에 이르기 전 금융소비자와 금융회사의 자율합의를 유도하는데 인력과 재원을 집중하고 있다. 덕분에 FOS가 직접 조정 결정을 내리는 경우는 접수된 분쟁 중 10%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금융회사가 FOS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FOS가 패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개별 민원이 아닌 금융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의 경우 금융감독청(FCA)이 FOS를 대신에 직접 개입한다. FCA는 금융상품 불완전판매에 대해 민원이 제기된 시기와 상관없이 시정조치를 명령할 수 있는 감독권을 가지고 있는 만큼, 더욱 강력한 금융소비자 보호가 가능하다. 

실제 영국에서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키코와 유사한 ‘이자율헤지상품(Interest rate hedging product)’ 관련 분쟁이 발생한 바 있다. 이 상품은 기업이 급격한 이자율 상승 위험을 회피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상품으로 키코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다.

당시 FCA는 법원의 손해배상소송과는 별도로 자체 조사를 통해 해당 상품을 판매한 금융회사의 대규모 자율보상을 유도했다. 형식적으로는 ‘자율보상’이었지만, FCA가 법규를 위반한 금융회사에 피해보상을 명령하고 보상절차를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이용우, 금소법 개정안 발의 '편면적 구속력' 힘 실어

한편, 국내에서도 금융당국 및 분쟁조정기구에 FOS와 같은 편면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2일 소액 분쟁조정사건에 한해 금감원 분조위 조정안에 강제력을 부여하는 내용의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개정안은 2천만원 이하의 금융분쟁에 대한 분조위 조정안을 금융소비자가 수락한 경우, 금융회사 수용 여부와 관계없이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을 갖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편면적 구속력’이 금융회사의 재판청구권을 제한해 헌법에 위배된다는 반론도 있는 만큼, 해당 법안이 최종적으로 국회를 통과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윤 원장이 시작한 ‘편면적 구속력’ 논쟁이 금융분쟁조정의 실효성 강화라는 결과로 이어질지 관심이 집중된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