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3일 강경화 외교부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이 G20(주요 20개국) 외교장관회의가 열린 일본 나고야 관광호텔에서 양자회담을 하기위해 자리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해 11월 23일 강경화 외교부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이 G20(주요 20개국) 외교장관회의가 열린 일본 나고야 관광호텔에서 양자회담을 하기위해 자리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국 법원이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국내 자산 매각 절차에 돌입하자, 일본이 강력한 추가 보복조치를 예고했다. 한일갈등 재점화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는 가운데, 오히려 이번 사태가 대화 재개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지난 1일 일제 강제징용 가해 기업인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과 포스코의 합작회사인 피앤알(PNR)에 대한 압류명령 결정 등의 공시송달을 결정했다. 공시송달의 효력은 오는 8월 4일 0시부터 발생하며, 이 시기가 지나면 법원이 압류된 일본제철의 국내 자산에 대한 현금화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018년 이춘식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확정판결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일본제철이 대법원 판결을 따르지 않자, 강제징용 피해자 대리인단은 포항지원을 통해 일본제철 국내 자산에 대한 압류에 나섰다. 현재 일본제철에 대한 자산 매각 집행은 총 3건(PNR 주식 19만4794주, 액면가 5000원 기준 9억7397만원)이 진행 중이다.

◇ 日, 수출규제 강화, 금융제재 등 보복카드 만지작 

일본 정부는 즉각 보복조치를 예고하며 법원의 공시송달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 4일 오전 정례 기자회견에서 “압류한 일본기업의 자산을 현금화하는 것은 한일관계에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한국 측에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다”며 “일본 기업의 합법적 경제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선택지를 염두에 두고 계속 의연하게 대응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앞서 일본은 지난해 7월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와 관련해 수출규제 강화조치를 시행하며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를 감행한 바 있다. 지난 1월에는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 시 “한국과의 무역을 재검토하거나 금융제재에 착수하는 등 방법은 여러 가지 있다”며 “어떤 방법이든 일본보다 경제규모가 작은 한국이 먼저 피폐해질 것”이라고 추가 보복조치를 예고했다. 

일본제철의 자산 현금화에 대응해 일본 정부가 도입할 수 있는 조치로는 수출규제 품목 확대, 한국의 일본 내 자산 압류, 농수산품 등에 대한 관세 인상, 한국인 대상 입국비자 발급 제한 등이 꼽힌다. 

우선 한국 기업의 일본 의존도가 높은 품목을 중심으로 수출규제 강화조치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현대경제연구원이 발간한 ‘한·일 주요 산업의 경쟁력 비교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4227개 품목 중 의존도가 90% 이상인 품목은 총 48개로 집계됐다. 특히 화학공업, 광물성 생산품, 차량·항공기·선박 관련품, 기계류·전기기기 등이 대표적으로 일본 의존도가 높은 분야다. 

금융보복도 일본 정부가 고려할만한 카드 중 하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진출한 외국계 은행 중 일본계 은행의 총 여신은 지난해 6월말 기준 약 23조원 규모로 이 중 기업대출 비중이 약 65%를 차지한다. 일본 정부가 금융보복을 통한 한국 기업의 ‘돈줄 말리기’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日 보복조치 영향 제한적... 대화 재개 가능성은?

반면,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의 선택지가 제한적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우선 수출규제의 경우 이미 가장 강한 카드를 뽑았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한 선례가 있다. 일본은 지난해 7월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핵심소재 세 가지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했으나, 오히려 국내 기업의 일본 의존도를 낮추는 결과만 초래했다. 아예 대체불가능한 품목이 아니라면, 수출규제는 오히려 일본 기업의 수출경쟁력만 약화시키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4일 JTBC ‘아침&’에 출연해 “기계, 장비, 부품 같은 경우 유럽에 대체재가 얼마든지 있다. 일본이 저럴수록 일본에 대한 의존도만 자꾸만 약화시키는 것”이라며 “거래처를 바꾸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금융보복 가능성도 이미 지난해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등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효과가 제한적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국내 금융시장의 일본 의존도가 높지 않은 데다, 외환보유액도 세계 9위 수준(지난달 말 기준 4073억1000만 달러)으로 넉넉한 상황이기 때문. 게다가 일본 금융사가 타당한 이유 없이 만기 연장을 거부하거나 신규 영업을 중단할 경우 입을 손실도 고려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법원의 공시송달 결정으로 일본과의 외교적 대화가 재개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실제 법원 결정에도 불구하고 일본제철의 국내 자산 현금화는 연내 시작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공시송달 효력은 8월 4일부터 발생하지만, 이후 일본제철이 채무자 심문에 응할 경우 2~4개월의 시간이 더 소요되기 때문. 당장 현금화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는 연내 일본과의 협상 재개를 요구하는 압박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재개한 미국이 동맹국 간의 갈등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일본의 강경대응은 쉽지 않아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오는 9월 열리는 주요 7개국 정상회의(G7)에 한국·호주·인도·러시아도 초청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중국과 갈등관계인 동맹국을 규합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고려할 때, 오히려 G7 회의에서 한일 정상이 타협점을 찾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법원의 공시송달 결정에 따른 한일 갈등의 여파가 국내 증시에 미칠 영향도 높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NH투자증권 박주선 연구원은 5일 “지난해 일본 각의 내용을 되짚어볼 때, 글로벌 공급망에 차질을 줄 정도의 조치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하다”며 ”한일 갈등은 자산 현금화 및 WTO 제소 이슈 전후로 다시 한번 불거질 수 있으나 주식시장 및 수출 차질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학습효과가 관련 여파를 축소시킬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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