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 마련된 고 최모 경비원를 위한 추모 공간에서 한 시민이 분향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12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 마련된 고 최희석씨를 위한 추모 공간에서 한 시민이 분향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아파트 주민의 폭력·폭언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경비노동자 고 최희석씨에 대한 산업재해가 신청된다. 하지만 최씨의 사망이 산재 승인을 받을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앞서 지난 18일 ‘고(故) 최희석 경비노동자 추모모임’(이하 추모모임)은 사망한 최씨의 유족들의 동의를 받아 이번 주중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유족 보상을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18년 8월부터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해온 최씨는 지난달 21일 주차단속 문제로 주민 A씨와 다툰 뒤 지속적으로 폭력·폭언을 당하다 이달 10일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37조 2항은 “근로자의 고의·자해행위나 범죄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은 업무상의 재해로 보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업무상의 재해로 인정된다.

추모모임 측은 최씨가 주차 단속 등 경비원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아파트 주민으로부터 폭력을 당해 사망에 이른 것이라며 이를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단이 아파트 주민의 ‘갑질’로 인해 최씨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최씨의 산재가 승인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2014년 아파트 주민의 갑질에 시달리다 분신 후 숨진 아파트 경비원 이모씨에 대해 산재를 승인한 바 있다. 당시 공단은 “업무 중 입주민과의 심한 갈등과 스트레스로 인해 기존의 우울상태가 악화됐고, 정상적인 인식능력을 감소시켜 자해성 분신을 시도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씨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이씨가 이미 2012년 우울증 등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다며 개인적 요인에 의한 사망이 아니냐는 이견도 있었지만, 공단은 “기존 질병과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업무상 스트레스를 상당 부분 인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태의 경우 아파트 주민의 폭력·폭언과 최씨의 ‘정신적 이상상태’ 간의 인과관계가 뚜렷해 산재 승인 과정에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백성문 변호사는 19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2014년 아파트 주민의 지속적 괴롭힘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던 경비원에게 산재가 인정됐는데, 최씨 사건과 굉장히 유사하다”며 “그걸 기초로 해서 본다면, 사망한 결과와 괴롭힘의 인과관계를 인정해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론”이라고 밝혔다. 

최씨의 죽음을 계기로 '업무상 재해'에 대한 모호한 기준을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 지난 1월 제주공항에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숨진 20대 경비원 고 김모씨의 경우 공단에서 산재 승인을 받지 못했다. 업무상 괴롭힘이 명확하지 않고 사업장 또한 조치를 취한 뒤 화해를 유도했다는 것이 불승인의 이유였다. 

산재 승인 여부는 공단이 정신과 의사 등 전문가로 구성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열어 결정한다. 판정위에서는 사망자의 정신질환 병력과 업무상 스트레스의 수준, 업무와 정신적 이상상태의 인과관계를 중점적으로 따진다. 만약 이전에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질환을 산업재해로 판정받은 적이 있는 경우 자살 또한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확률이 높다.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 유족이 직접 사망자가 직장 내 괴롭힘 등 업무적인 요인으로 인해 평균적인 수준보다 훨씬 높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구체적인 상황을 입증해야 한다. 이 때문에 사측이 유족에 비협조적으로 나올 경우, 실질적으로 산재 승인을 받기 어려워질 수 있다.

게다가 판정위는 개인적 성향 등 업무 외적 요인이 자살에 미친 영향도 검토한다. 사망자에게 정신질환 가족력이 있다거나 가정불화가 있는 경우, 학창시절 생활기록부에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는 기록이 있는 경우 등이 모두 판정위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유족들이 생활기록부나 건강보험요양급여 내역 등을 확보해 개인적 요인에 따른 사망이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다행인 것은 공단 측에서도 지나치게 엄격한 판정 기준을 개선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공단의 업무상 자살 산재 승인율은 지난 2012년 37%에서 2018년 82%로 크게 상승했다. 

하지만 산재 승인이 어렵다는 이유로 신청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업무상 정신질환 및 자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 지난 2017년 기준 정신질환 진료를 받은 직장인 55만8255명 중 산재를 신청한 경우는 213건으로 겨우 0.04%에 불과하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공동대표는 지난 3월 12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우리 사회는 ‘자살은 개인 문제다’라는 통념이 굉장히 강해서 산재로 인정받기까지 장벽을 넘기가 쉽지는 않다”며 “사회문화적으로 자살이 개인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고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공통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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