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정보가 일치하는 사회 이룰 것"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기자님 혼자 수십 명의 IT 전문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나요?”

23일 만난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는 단체를 설립한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오히려 이렇게 반문했다.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듣기만 하고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답한 기자에게 함 대표는 “그게 바로 느린 학습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느끼는 어려움”이라고 설명했다. 

‘느린 학습자’는 발달장애, 경계선지능 등 문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뜻하는 피치마켓만의 표현이다. 지난 2015년 설립된 피치마켓은 ‘느린 학습자’의 실질문맹 개선과 정보평등을 위해 다양한 책을 쉬운 글로 번안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온 비영리단체다. 경계선지능, 발달장애를 비롯해 문해력이 부족한 모든 이들을 위해 문학과 비문학을 가리지 않고 5년간 약 60권의 책들을 새로 써왔다. 

함 대표는 느린 학습자들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능력의 차이가 아닌 정보의 차이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느린 학습자들의 문해력에 적합하게 쓰인 도서가 부족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정보의 깊이’가 달라 원활한 소통이 어렵다는 것. <이코리아>는 “우리의 목표는 느린 학습자들이 다른 이들과 같은 토대 위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는 함 대표를 만나 피치마켓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 유엔환경계획(UNEP) 한국위원회에서 일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환경 분야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느린 학습자를 위한 글쓰기’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원래 글을 통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그 생각이 구체화됐다. 당시에는 법전을 이해하기 너무 어려워 사전을 뒤져가며 읽다 보면 한 페이지 넘어가는 데 한 시간씩 걸리곤 했다. 전공시험을 봐도 같은 스타일로 답안을 써내야 좋은 점수를 받으니, 나도 그런 식의 글쓰기에 익숙해져 버렸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겪는 동기들도 많았다. 난해한 글을 읽고, 거기에 익숙해져 자신도 난해한 글을 쓰는 악순환이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느린 학습자를 위해 이해하기 쉬운 글을 쓰는 작업을 구상하게 됐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제 커리어가 환경 분야로 향하게 된 것이 오히려 우연이었던 것 같다.

피치마켓이 자체 제작해 배포하는 월간지 '리:북(RE:BOOK)'.
피치마켓은 매달 느린 학습자를 위해 독서교육자료 '리:북(RE:BOOK)'을 제작해 배포하고 있다.

- 피치마켓의 출발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지만, 지금까지 제작한 도서목록을 보면 문학과 비문학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해왔다. 두 장르의 도서를 쉬운 글로 옮겨 쓰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나?

비문학보다는 문학을 번안하는 작업이 훨씬 더 어렵다. 비문학은 정보전달이라는 목적이 뚜렷해, 거기에 맞춰 작업하게 돼서 더 수월한 면이 있다. 

하지만 문학은 작가 고유의 문체가 주는 느낌도 다르고, 독자마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문학작품을 이해하기 쉬운 글로 옮기다 보면, 문학의 복합적인 특성들을 어느 정도 잘라내게 된다. 결과물도 완전히 새로운 글이 되다 보니, 비장애인이 읽으면 “이건 톨스토이 작품이 아니라 피치마켓 작품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치마켓은 다양한 문학작품을 계속 쉬운 글로 옮겨 쓰고 있다. 문학작품을 번안할 때 피치마켓이 고수하는 원칙이 있다면?

우리의 확고한 원칙 중 하나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느린 학습자들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코리아>와 같은 언론은 사람들이 모르는 정보를 발굴해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지만, 우리는 느린 학습자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비장애인들은 교과서나 부모님이 사준 책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문학작품을 읽게 된다. 그래서 유명한 몇몇 문학작품들은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느린 학습자들은 교과서에 수록된 문학작품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부모가 독서를 권장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래서 또래끼리 대화를 나눌 때, 정보의 깊이가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봤다. 

우리는 느린 학습자가 피치마켓이 번안한 쉬운 문학을 일고 또래들과 수월하게 대화를 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학작품 번안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보다 느린 학습자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효과에 집중해서 꿋꿋하게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실제 꽤 많은 책이 판매까지 이어졌는데, 이런 사실 자체가 느린 학습자들의 문학에 대한 수요를 입증한다고 생각한다. 

- 쉬운 글로 옮겨쓸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뭔가.

문학의 경우,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나 청소년 필독서를 위주로 번안한다. 또래의 비장애인이 읽는 책은 느린 학습자도 함께 읽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교사들과의 네트워크도 형성돼있어, 어떤 책을 번안할지 추천을 받고 있다. 

비문학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번안한다. 예를 들어, 선거 공약집 번안은 느린 학습자의 참정권과 직결되는 작업이다. 느린 학습자도 공약을 이해하고 투표권을 행사하려면 우리가 직접 쉬운 글로 옮긴 공약집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밖에도 근로계약서나 노동법 등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상황에 맞게 선정하고 있다. 

피치마켓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함께 제작한 쉬운 글로 된 21대 총선 설명자료. 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피치마켓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함께 제작한 쉬운 글로 된 21대 총선 설명자료. 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 피치마켓은 지난 19대 대선부터 쉬운 공약집을 제작해 배포하고 있다. 이번 4·15 총선에서도 쉬운 공약집을 제작했나?

19대 대통령 선거는 후보가 적어서 작업이 수월했지만, 국회의원 선거 같은 경우 후보가 너무 많이 모든 후보의 공약을 번안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신 이번 총선에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협력해 전반적인 투표절차를 설명하는 자료를 제작했다. 

사실 정치적인 글을 번안하는 것은 고민이 되는 작업이다. 느린 학습자들에게는 피치마켓이 유일한 창구인데, 자칫 우리가 중립을 지키지 못하면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참여를 자제하고, 선거 공약집도 각 캠프의 확인을 받고 작업을 하고 있다. 

- 월간지 ‘리:북(RE:BOOK)’을 통해 언론기사도 쉬운 글로 번안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뉴시스>과 협약을 맺고 하루에 9건 정도의 기사를 번안해 송출했다. 그런데 점차 피치마켓의 목표가 명확해지면서 번안하는 기사 수를 줄이게 됐다. 우리 목적은 느린 학습자들이 비장애인과 소통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하루 9건의 기사가 의미가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지금은 적은 수의 기사라도 현재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의제와 관련된 것을 중심으로 번안하고 있다. 옮겨 쓴 기사는 피치마켓이 출판하는 월간지 ‘리:북(RE:BOOK)’을 통해 제공된다.

- 최근에는 어떤 이슈를 중심으로 기사를 번안하고 있나?

최근에는 코로나19에 대한 뉴스를 쉬운 글로 옮기는데 집중하고 있다. 어딜 가도 코로나19 이야기뿐이지 않나. 기존 기사 외에도 우리가 직접 질병관리본부나 대한의사협회, 세계보건기구(WHO)와 접촉해 인터뷰를 하거나 팩트체크 기사를 쓰기도 한다. 

코로나19에 대해서 다루게 된 이유는 가장 관심이 높은 이슈이면서 가장 위험성이 높은 이슈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와 관련된 가짜뉴스가 너무 많은데, 느린 학습자들이 이를 잘못 받아들이게 될 위험이 크다. 예를 들어 확진자의 눈을 쳐다보면 코로나19에 감염된다던가 하는 뉴스를 믿게 될 수도 있고, 그런 가짜뉴스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 느린 학습자들은 글만 읽어서는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지를 추가해 기사의 디자인을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사진=대웅제약 홈페이지
피치마켓이 대웅제약과 함께 제작한 발달장애인을 위한 '코로나19' 쉬운 글 도서. 자료=대웅제약 홈페이지

- 기자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기사를 쓰는 방법을 항상 고민한다. 피치마켓이 느린 학습자를 위해 기사를 쓰는 과정이 궁금하다. 

쉽고 짧게 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쉬운 단어, 짧은 문장을 쓴다고 해도 느린 학습자들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읽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단기 기억력이 부족한 느린 학습자라면 한 문단을 읽고 나서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면 앞 문단 내용이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 이미지가 없으면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피치마켓은 이처럼 느린 학습자가 겪는 다양한 문제들을 반영해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그래서 비장애인들에게는 피치마켓이 쓴 기사들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 도서 제작 외에도 1대1 대면 독서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교육지원이 쉽지 않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 교육사업을 진행하고 있나?

최근에는 사회적 거리두기 권고에 따라,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활용해 1대1 온라인 독서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여전히 대면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때 서로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 변화와 기술 발전도 반영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피치마켓의 교육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꾸지는 않을 생각이다. 

물론 지방에 거주해 피치마켓을 방문하기 어려운 느린 학습자들에게는 온라인 교육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마무리돼도 지방 거주자들을 위해 온라인 교육지원을 유지하되, 점차 지방에서 대면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사를 양성하는데 집중할 계획이다. 

- 지난해 서울시에 ‘시끄러운 도서관’ 사업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느린 학습자들에게 ‘시끄러운 도서관’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해달라.

피치마켓 교사들이 외부 요청에 따라 다른 기관에 출강을 가는 경우가 있다. 복지관이나 학교는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전용 공간이 있어 괜찮은데, 도서관 같은 경우는 눈치가 보이거나 쫓겨나는 경우가 많았다. 자폐성향이나 ADHD가 있는 느린 학습자들과 독서교육을 진행하다 보면 소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느린 학습자들의 독서교육은 책을 소리 내어 읽거나 대화를 나누며 진행된다. 낭독과 대화 또한 일반 이용자들에게는 컴플레인의 이유가 된다. 그래서 이렇게 눈치를 보느니 ‘시끄러운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공간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름을 ‘시끄러운 도서관’이라고 지었지만, 굉장한 소음을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느린 학습자들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현재는 서울시에서 관내 7개 도서관을 ‘시끄러운 도서관’으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는 상태다. 피치마켓 본사 공간도 활용 중이지만, 장소가 협소해 코로나19가 마무리 되는 대로 별도의 공간을 물색할 계획이다. 

라이엇게임즈가 운영하는 '리그오브레전드'의 자선 단체 기부 투표 화면. 오른쪽에 피치마켓의 이름이 보인다.
라이엇게임즈는 '리그오브레전드' 클라이언트에서 자선 단체 기부 투표를 진행하고 있다. 오른쪽에 피치마켓의 이름이 보인다.

- 최근 ‘리그오브레전드’를 운영하는 라이엇게임즈의 기부 대상 단체 세 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됐다. 

사실 피치마켓에 게임을 즐겨 하는 사람이 없어서 라이엇게임즈가 어떤 곳인지도 잘 알지 못했던 상태였다. 처음 라이엇게임즈 담당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감사하지만 개인 기부는 받지 않고 있다”며 제안을 거절해, 담당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기부 대상으로 선정된 뒤에는 하루에 3만여 명씩 피치마켓 홈페이지를 찾아오고 있어, ‘리그오브레전드’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 라이엇게임즈의 지원을 받았으니, 게임 쪽으로 사업 분야를 다양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게임은 아니지만 다른 분야의 기업들과 다양한 협력사업을 진행해왔다. 가전제품 유통업체의 요청으로 설명서를 쉬운 글로 바꾸는 작업도 해봤고, 장애인 대상 여론조사를 쉬운 질문지를 만드는 작업도 해봤다.

게임도 그러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발달장애인들이라고 단순하고 유치한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게임 인기순위를 비교해보면 거의 비슷하다. 그들도 ‘리그오브레전드’를 즐겨 하고 복잡한 MMORPG도 좋아한다.

기존 게임에 약간의 장치만 추가한다면, 느린 학습자들이 게임을 즐기고 다른 이용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늘어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피치마켓이 게임사들과 협력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굉장히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만약 라이엇게임즈의 후원을 받게 된다면 향후 어떤 사업을 추진하고 싶나?

예산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다면 느린 학습자를 위한 전용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 ‘시끄러운 도서관’을 넘어서 느린 학습자들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을 만드는 것이 피치마켓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그런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느린 학습자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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