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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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경영안정자금 1조원을 지원받아 한숨을 돌린 두산그룹이 직접 1조원 규모의 자구안을 마련하라는 채권단의 요구로 고민에 빠졌다. 우선 알짜계열사 지분 매각으로 급한 불을 끄려 하고 있지만, 자본 확충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채권단은 지난달 1조원의 신규 자금을 두산그룹에 지원하면서, 같은 규모의 고강도 자구안 마련을 요구했다. 1조원의 긴급수혈만으로는 현재의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

현재 두산중공업의 총 차입금은 약 4조9000억원으로 이중 4조2000억원이 올해 만기가 도래한다. 이달 만기인 외화공모사채 6000억원은 수출입은행이 대출로 전환하고, 긴급경영안정자금 1조원과 두산중공업이 자체 보유한 현금 3500억원을 투입해도 여전히 2조원이 넘는 차입금이 남는다. 

두산은 알짜계열사로 꼽히는 두산솔루스의 지분을 매각해 현금을 추가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두산과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및 기타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두산솔루스 지분은 약 50%. 금융권에 따르면, 두산은 사모펀드 운용사 ‘스카이레이크’와 매각 협상을 진행 중이다. 매각이 완료되면 두산은 약 6000억원 가량의 실탄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사진=뉴시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사진=뉴시스

◇ 두산 위기, 어디서 시작됐나?

두산솔루스 지분 매각으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지만, 현재 두산그룹이 처한 위기의 배경에는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외부 요인보다는, 부실 경영이라는 내부 요인이 놓여있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체질 개선은 불가피하다.

두산그룹 유동성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두산건설의 무리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개발사업이다. 대표적으로 2013년 완공된 일산 두산위브더제니스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분양이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할인분양에 따른 적자만 1646억원에 달한다.

2006년 시작한 울산 대현 주택사업은 10년 만인 2015년 분양했지만 1437억원의 손실을 냈다. 천안 청당, 용인 삼가, 화성 반월 등의 PF 보증도 7705억원 규모지만 아직 분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잇따른 실책으로 두산건설은 2011년부터 9년 연속 적자 행진을 이어가다 결국 지난해 상장폐지됐다. 문제는 두산건설의 실책이 반복되는 동안 그룹 경영진이 제동을 걸기는커녕 밑빠진 독에 물을 붓듯 지원을 계속했다는 것.

2011년 1171억원의 자금 지원을 시작으로 두산중공업이 지난 10년간 두산건설에 쏟아부은 금액만 모두 1조9252억원. 여기에는 ‘알짜’로 꼽히던 배열회수보일러(HRSG) 사업부의 매각대금 3000억원과 두산DST 매각대금 3500억원이 포함돼있다. 단순히 손실을 떠안은 것을 넘어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넘기면서까지 두산건설 회생에 매달렸지만, 남은 것은 두산건설의 상장폐지와 두산중공업으로의 자회사 편입이었다.

두산그룹이 두산건설을 조기에 매각하고 알짜 사업부를 지켜냈다면, 그룹 전체로 리스크가 전이되지는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두산그룹은 왜 진작 두산건설을 내려놓지 못했을까? 업계에서는 두산그룹 특유의 가족경영 시스템을 원인으로 꼽고 있다.

두산그룹은 지난 2016년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 박정원 전 두산건설 회장을 신임 대표로 맞이하면서, 본격적인 4세 경영시대를 열었다. 사촌들이 계열사 수장을 나눠 맡는 복잡한 가족경영 체제에서는 두산건설 매각이라는 중대 결단을 내리는 것도, 박정원 회장과 박태원 두산건설 부회장에게 대한 책임을 묻는 것도 어렵다. 

9일 시민·노동단체가 두산중공업 경영진에 대한 고발장을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했다. 사진=참여연대
9일 시민·노동단체가 두산중공업 경영진에 대한 고발장을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했다. 사진=참여연대

◇ 위기의 두산, 근본적 체질개선 필요

두산그룹이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두산중공업과 두산건설을 내려놓는 지배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두산그룹은 ㈜두산→두산중공업→두산인프라코어→두산밥캣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이루고 있다.

채권단은 두산건설에서 시작된 리스크가 계열사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현재의 직렬식 지배구조를 ㈜두산이 직접 두산인프라코어를 지배하는 병렬식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을 사업부문과 인프라코어 지분을 보유한 투자부문으로 분할한 뒤, 투자부문을 ㈜두산과 합병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하지만 그룹 역량이 집중된 두산중공업과 두산건설을 떼어내는 것은 오너일가 입장에서도 상당한 부담이다. 게다가 박정원 회장은 여전히 두산건설 회장을 겸임하고 있다. 박 회장이 실제로 중공업·건설 부문을 내려놓는 방식의 지배구조 개편에 착수할 지는 아직 확신하기 어렵다.

박정원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의 책임론도 대두된다. 경영을 전담한 오너 일가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두산건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 그룹 전반에 리스크가 전이됐다는 것. 실제 민변·민주노총·금속노조·참여연대 등 시민·노동단체는 지난 9일 박지원 두산중공업 회장을 포함한 이사진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과 형법상 업무상배임 혐의로 검찰 고발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두산건설의 무리한 사업으로 인해 발생한 부실이 계속될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판단 근거 없이 지원을 결정한 두산중공업 및 이사들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두산그룹은 1조원 규모의 자본 확충 방안을 포함한 자구안을 마련해 다음주 채권단에 제출할 방침이다. 일각에서는 오너 일가의 사재 출연 약속을 자구안에 포함하는 등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정원 회장이 두산그룹의 체질 개선을 위해 채권단에 내놓을 카드가 무엇일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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