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사진=뉴시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사진=뉴시스

한국은행이 ‘한국식 양적완화’의 첫 발을 내디뎠다. 시장에서는 단기적 유동성 위기에 긍정적 효과가 있을 거라며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일각에서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한국은행은 26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한국은행의 공개시장운영규정과 금융기관대출규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번 개정안을 통해 한은은 오는 6월까지 매주 1회 정례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창구를 열고, 한도 없이 시장의 유동성 수요 전액을 공급할 방침이다. 또한 RP 매매 대상기관도 기존 22곳(은행 17개, 비은행 5개)에서 33곳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환매조건부채권(RP)은 금융기관이 일정 기간 후 확정금리를 보태서 되사는 조건으로 발행하는 채권으로, 주로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에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기존에는 유동성 과부족을 방지하기 위해 한은 판단에 따라 비정기적으로 RP를 매입했지만, 이번 조치로 인해 사실상 시장의 유동성 수요를 전부 충족시키는 무제한 매입이 가능해졌다.

한은은 이번 무제한 RP 매입이 사실상 한국식 ‘양적완화’라고 인정했다.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바탕으로 국채 및 일정 신용등급 이상의 채권을 매입해 유동성을 시장에 직접 공급하는 정책을 의미한다. 정책금리 인하 등 전통적인 통화정책으로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어려울 때 택하는 수단으로, 최근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위기 대응을 위해 여러 국가에서 공격적인 양적완화를 선택하고 있다.

윤면식 한국은행 부총재는 이날 금통위 회의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은의 무제한 RP매입이) 사실상 양적완화 아니냐고 했을 때 꼭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며 “그렇게 보셔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윤 부총재는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는 정책금리를 제로(0) 수준까지 낮춘 뒤, 더 이상의 정책 수단 여력이 없을 때 돈을 공급하는 방식”이라며 “공급방식은 주로 국채나 주택저당증권(MBS) 등 여타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규모나 기간을 특정해서 한 것으로, 한은이 발표한 전액 공급 방식의 유동성 지원제도와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한은이 사실상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택한 것은 코로나19로 인한 유동성 경색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존 조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사태가 실물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면서 시장에 단기자금이 씨가 마르자, 한은이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것.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 또한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며 국채와 MBS 무제한 매입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금투업계는 한은의 ‘한국식 양적완화’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메리츠종금증권 윤여삼 연구원은 이번 조치에 대해 “단기자금 시장 불안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3월 중 2.5조원 규모의 RP매입을 실시했음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자 한은이 채권을 담보로 시중 유동성 공급을 끝까지 책임지기로 결정한 것”이라며 “한국은 기축통화국가가 아니라는 현실을 감안한 한은이 제시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평가했다. 

윤 연구원은 이어 “무제한 RP 매입은 단기 유동성 위축 해소에도 도움을 주었지만, 향후 정부 금융안정 패키지 과정에서 정책금융기관들의 늘어나는 조달부담을 일부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라며 “산금채나 일부 공사채 발행이 늘어도 이를 한은에 RP로 맡기고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어 시장 안정에 기여가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한은의 첫 번째 양적완화 조치로 인한 부작용도 우려하고 있다. 시중에 유동성을 무제한으로 공급해 단기적으로 자금부족 현상을 해소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원화 가치 하락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 다만 얼마 전까지 디플레이션 우려가 제기될 정도의 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인플레이션 부담이 크지 않은 데다, 미국 또한 무제한 양적완화에 나서고 있어 원화 가치 급락 리스크도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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