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플래트닝 커브' 개념을 설명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그래프. Y축은 일일 확진자 수, X축은 최초 확진자 발생 후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자료=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급증하면서,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방역대책을 유지했던 서구권 국가들도 ‘사회적 거리두기’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는 모양새다. 특히, 미국에서는 코로나19 대책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한 ‘플래트닝 커브(Flattening the Curve)’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플래트닝 커브는 주로 금융권에서 수익률 등의 곡선이 평탄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역학적으로는 적극적인 방역조치를 통해 감염병의 확진자 수의 증가 속도를 최대한 늦춰 의료시스템의 수용 능력 이상으로 사태가 심각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감염병 자체를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의료 인프라가 대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상황을 통제하자는 것. 

방역대책으로서의 플래트닝 커브는 이미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지난 2007년 제시한 개념이지만, 지난달 29일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이를 코로나19 대책의 핵심 개념으로 조명하면서 서구권에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코로나19에 적극적인 방역대책을 통해 대응하고 있는 한국에게 플래트닝 커브는 익숙한 개념이다. CDC가 2007년 발표한 잠정적 팬데믹 대응계획에 따르면, 플래트닝 커브를 위한 핵심 조치는 학교 폐쇄, 재택근무, 집회 취소 등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감염병 전파의 통로를 최대한 봉쇄하는 것이다. 

한국이 이미 코로나19 대책으로 시행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서구 사회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확산 시기가 다른 것도 있지만, 문화적 차이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악수나 키스 같은 신체적 접촉을 동반한 인사법이 일상화돼있는 데다, 마스크 착용을 선호하지 않는 분위기 등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쉽지 않다는 것.

정부나 기업이 나서 방역 조치를 취해도 이러한 문화적 차이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예를 들어, 지난 10일(현지시간) 스페인에서 열린 발렌시아와 아탈란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는 코로나19의 위험 때문에 무관중 경기로 치러졌지만 열광적인 발렌시아의 팬들은 경기장 밖에 모여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불과 이틀 뒤인 12일 기준 스페인의 누적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2968명으로 전일 대비 828명(38.6%)나 증가했다. 

미국프로농구(NBA)에서도 서구권에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잘 실천되지 않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1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유타 재즈 소속의 루디 고베어 선수는 이미 확진 전 증상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자회견이나 라커룸에서 일부러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만지거나 신체접촉을 하는 등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1일 고베어 자신이 확진 판정을 받고, 다음날 동료인 도노반 미첼마저 고베어로부터 전염된 것이 확인되면서 팀 동료와 팬들의 비난 세례를 받고 있다.

장기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에 익숙해진 한국과 달리, 미국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뿌리내리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단계다. 현재까지 328명의 확진자가 발생한 뉴욕주의 경우, 12일부터 500명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브로드웨이 또한 내달 12일까지 모든 공연을 중단할 방침이다. NBA 또한 최소 30일간 리그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관계 단절로 건강 악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특히, 노년층은 코로나19로 인한 사망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아 사회적 거리두기가 더욱 강요된다. 이는 이미 사회적 고립에 빠져 있을 확률이 높은 노년층의 건강에 또 다른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과학한림원(NAS)이 최근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회적 고립은 노년층의 치매 위험을 50%, 관상 동맥성 심장질환은 29%, 암 사망률은 25%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정신건강의 악화 또한 확인됐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코로나19로부터는 안전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사회적 고립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

UC샌프란시스코 대학 노인병학 전문가 카를라 페리시노토는 12일 미국 온라인매체 복스(VOX)와의 인터뷰에서 “외로움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심대하다”며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피해가 심각해지고 관계를 회복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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