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클레그 페이스북 부사장이 24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애틀랜틱 페스티벌'에서 정치인들의 발언에 대한 팩트체크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진=페이스북 공식 블로그 갈무리
닉 클레그 페이스북 부사장이 24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애틀랜틱 페스티벌'에서 정치인들의 발언에 대한 팩트체크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진=페이스북 공식 블로그 갈무리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이 정치인들의 게시물에 대해서는 팩트체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페이스북에서 국제업무 및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닉 클레그 부사장은 24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아틀란틱 페스티벌’에서 이같이 말했다. 정치인이 올린 게시물은 폭력을 조장하거나 유료 광고가 아닌 이상 페이스북의 게시물 규정을 위반하더라도 삭제하지 않겠다는 것. 클레그 부사장은 자신의 연설 내용을 정리해 같은 날 페이스북 공식 블로그에도 게시했다.

이는 2016년 미 대선 이후 팩트체크에 상당한 공을 들여온 페이스북의 그간 행보와 반대된다. 페이스북은 지난 2016년 대선에서 러시아에 의해 가짜뉴스의 유통경로로 활용돼 선거 결과를 왜곡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페이스북은 국제팩트체킹네트워크(IFCN)의 인증을 받은 30여 개의 외부 팩트체크 전문기관과 손잡고, 가짜뉴스로 의심되는 게시물에 대한 사실 여부를 검증하고 있다. 또한 가짜뉴스로 의심되는 게시물에 대한 신고기능을 추가하는 한편, 가짜뉴스로 판별된 게시물에 경고문구를 달고 많은 가짜뉴스를 게시한 계정을 삭제하는 등 엄격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클레그 부사장은 스탠퍼드 대학 연구팀의 보고서를 인용해 ‘지난해 페이스북에 게시된 가짜뉴스는 2016년 이후 3분의 2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 페이스북, “우리는 심판이 아니다”

팩트체크 시스템 도입 이후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는 페이스북이 정치인들의 게시물을 예외로 남겨두기로 한 것은 의외의 결정이다. 이에 대해 클레그 부사장은 정치적 담론을 규제하는 것은 페이스북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클레그 부사장은 이날 연설에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발언은 민주주의 기능의 핵심이자 가장 엄격한 검증 대상”이라며 “경쟁 캠페인뿐만 아니라, 신문, 네트워크 및 케이블TV, 소셜미디어, 언론인, 토크쇼, 만화가 등 다양한 매체가 정치인의 발언을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클레그 부사장은 이어 “페이스북의 역할은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만드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정치적 참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정치인 발언에 대한 팩트체크가 오히려 페이스북의 정치적 개입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클레그 부사장은 “테니스에 비유하자면, 우리의 역할은 코트 표면을 평평히 하고 라인을 긋고 네트를 적절한 높이로 설치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우리가 라켓을 들고 시합을 뛰지는 않는다. 어떻게 게임을 할 것인지는 페이스북이 아닌 선수들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만약 페이스북이 직접 ‘선수’로 뛰게 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클레그 부사장은 “정치인들이 페이스북을 이용해 험담하거나 틀린 주장을 펼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서도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보라. 사기업이 스스로를 정치인들의 모든 발언에 대한 심판으로 임명한다면, 이를 사회 전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클레그 부사장은 이어 “나는 그럴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며 “열린 민주주의에서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의 발언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지적했다.

◇ 정치인 팩트체크 면제, "페이스북이 내린 최악의 결정"

정치인의 발언을 팩트체크 대상에서 배제하겠다는 페이스북의 결정에 대해 미국 내에서는 다양한 분석과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비영리단체 ‘알고리즘와치’의 파비우 키우시는 25일 트위터에 “이는 아마도 페이스북이 내린 모든 정책 결정 중 최악의 결정”이라며 “페이스북의 주된 ‘정치적 고객’들은 좀 더 엄격한 정책적 규제 기준을 적용받아야 한다. 그들은 진실과 존엄, 신뢰라는 측면에서 대중에게 더 큰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페이스북이 제시하는 팩트체크 면제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페이스북은 이미 2016년부터 보도가치(Newsworthiness)가 있고 공공의 이익에 심대한 중요성을 지니는 게시물의 경우 페이스북 규정을 위반하더라도 삭제하지 않겠다는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발언을 팩트체크하지 않겠다는 결정 또한 이러한 기준의 연장선 상에 있다.

문제는 ‘보도가치’라는 기준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25일 워싱턴포스트(WP)는 “보도가치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고 모호하다”며 “만약 대통령이 자기 트위터 계정에 다른 게시물을 ‘리트윗’한다면 그것은 보도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나”라고 지적했다.

정치인들의 발언에 대해 팩트체크를 하지 않겠다는 클레그 부사장의 발언은, 정치인들의 모든 발언에 대해 ‘보도가치’를 인정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치인들이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가짜뉴스를 인용해 자기 페이스북에 올린다고 하더라도, 정치인이 올린 게시물이기 때문에 ‘보도가치’가 인정될 수 있다는 것. 

한편 클레그 부사장의 이번 발언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인해 내년 대선 구도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된다. WP는 “페이스북의 정책은 미국의 최고지도자(U.S. commander-in-chief)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선출직 공무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트럼프’라는 변수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올린 무슬림 관련 가짜뉴스에 대해 페이스북 내부에서 심각한 논쟁이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WSJ에 따르면, 당시 일부 직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게시물이 페이스북의 ‘혐오발언’ 정책을 위반했다며 삭제할 것을 주장했으나 마크 주커버그 최고경영자(CEO)는 해당 게시물을 삭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 페이스북은 직접적인 개입을 지양하고 시민들의 자율적인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선택을 내렸다. 이는 "우리는 언론이 아닌 IT기업"이라는 주커버그 CEO의 지난해 4월 청문회 발언과도 일맥상통하는 결정이다. "사기업이 정치적 논쟁의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클레그 부사장의 주장과 "가짜뉴스의 범람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맞부딪히는 가운데, 페이스북의 이번 결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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