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나무 열매.<사진=국립산림과학원 제공>

어느덧 무덥던 여름이 가고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處暑)’를 넘겨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가을 산행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단풍구경이다. 머지않아 온 산이 곱게 단풍잎으로 물들 생각에 설레는 요즘, 나에겐 가을 산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알게 해준 특별한 나무가 있다. 바로 회나무다. 

산림자원학과 3학년 수목학 수업을 들을 때였다. 중간고사를 치렀는데, 방식이 좀 특별했다. 강의실에 앉아 시험지를 채우는 게 아니라 태백산을 오르면서 하면서 약 50개의 나무 이름을 맞추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선배들로부터 수목학 시험이 무척 어렵다고 들은 터라 나와 동기들은 하루 일찍 태백산에 도착해서 사전 공부를 하기로 했다. 우리는 당골광장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를 먼저 맞이한 것은 시원한 계곡길이었다.

회나무 미성숙 열매.<사진=국립산림과학원 제공>

10월 중순을 막 넘긴 때였는데 강원도의 가을은 다른 곳보다 일찍 찾아와 있었다. 계곡길에는 붉게 물든 나무들이 한두 그루씩 우리를 맞이해 주고 있었는데, 유독 나를 사로잡은 나무가 있었다. 나무껍질이 회색인 나무라는 뜻을 가진 회나무였다.

회나무는 소나무처럼 크게 자라는 대신 수수꽃다리처럼 사람 키 정도로 작았고 가지마다 빨갛고 동글동글한 열매가 사방으로 맺혀 있었다. 갈라진 선이 있는 동그란 열매는 벌어지기 전엔 작은 농구공을 닮았다. 열매는 4-5개의 조각으로 갈라지는데 그 안에는 보석 같이 선명한 주황색의 씨가 매달려 있었다.

그 색깔은 밤하늘의 어둠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화려했다. 어두운 계곡길을 아름다운 빛깔로 가득 채워 놓은 듯 회나무는 너무나도 인상 깊었다. 회나무의 아름다움 덕분이었는지 다행히 나와 동기들은 다음 날 태백산에서의 시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회나무 잎과 꽃.<사진=국립산림과학원 제공>

세월이 흘러 국립산림과학원에서 근무하면서 오대산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또 한 번 회나무의 아름다운 가을을 만날 수 있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오르는 숲길은 시원한 계곡을 따라 약 9km에 걸쳐서 차량으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다. 굽이굽이 나있는 길을 차를 타고 올라가다 보니 계곡 주변으로 빨간 열매로 가을 산을 장식하고 있는 회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다 똑같은 회나무인 줄 알았는데, 하나하나 살펴보니 회나무, 참회나무, 나래회나무가 모두 함께 자라고 있었다. 세 나무 모두 가느다랗고 송곳처럼 뾰족한 겨울눈이 있고 빨갛고 동그란 열매를 가지고 있어 언뜻 보면 비슷비슷해 보였다.

이 세 수종을 구분할 때 가장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열매이다. 회나무는 4-5개의 조각이 뭉쳐진 동그란 열매에 짧은 날개가 달려있고, 참회나무는 농구공처럼 날개가 전혀 달리지 않는 5개의 조각이 뭉쳐진 동그란 열매를 가지고 있다. 날개가 달리는 회나무라는 뜻의 나래회나무는 4개의 조각이 뭉쳐진 동그란 열매에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처럼 1cm 정도의 긴 날개가 사방으로 달리는 특징이 있어 회나무 3형제 중에서 가장 독특한 열매 모양을 가지고 있다.

회나무 겨울눈.<사진=국립산림과학원 제공>

회나무는 우리 주변에 조경수로 자주 만나는 사철나무와 사촌뻘이지만, 강원도를 비롯한 비교적 높은 산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강원도 산속에서 회나무를 만나더라도 가을이 아닌 다른 계절에 만나게 되면 그냥 스쳐 지나가기가 쉽다.

회나무는 곧게 위로 자라는 소나무, 잣나무와 다르게 가지가 여러 갈래로 뻗은 덤불 형태의 나무이며, 꽃은 여름이 시작하는 5월에 피는데 잎과 비슷한 황록색인데다, 1cm도 안 되는 작은 꽃이 피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하지만 더운 여름이 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면 비로소 감추었던 매력을 발산한다.

회나무의 선명한 가을빛 열매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빨간색 보따리에 주황색 보석을 품고 있는 회나무는 단연 ‘풍요의 상징’이자 ‘가을나무’라고 할 만하다. 나무마다 열매가 익어가는 풍요로운 가을 숲, 우리 회나무 3형제로 여러분의 마음도 따뜻해지기를 바라본다.

[필자소개] 

임효인 박사·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명정보연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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