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흔히 ‘신(神)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제주에 1만 8천의 신이 살고 있다고 하니 그렇게 부를 만도 하다. 제주에는 또 ‘당(堂)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절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당은 최소한 마을마다 한 개씩은 있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 하다. 제주에서 민간신앙인 무속이 얼마나 생활 속에 뿌리내렸는가를 입증해 주는 대목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육지와 동떨어진 섬, 특히 거센 바람과 돌투성이, 그리고 변덕 심한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섬사람들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신(神)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풍속조>에,

“제주 풍속에 대체로 산, 숲, 냇물, 연못, 언덕, 물가, 평지의 나무나 돌이 있는 곳에다 고루 신당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하여 매년 설날부터 정월 보름까지 무격이 신독(神纛)을 받들고 나희(儺戱)를 행한다. 징과 북을 울리며 안내하여 동리로 들어오면 사람들이 다투어 재물과 곡식을 내놓아 굿을 한다.”

고 적혀있다. 신독(神纛)은 신으로 받들어 위하는 큰 기(旗)를 말한다.

마을에 있는 본향당은 마을 전체의 안녕을 위해 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각 가정이 안고 있는 개인사를 풀어내는 비의(秘儀)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광장이자 밀실이기도 한 곳이다.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경기(驚氣) 들어 다 죽어가는 자식 살려달라는 아낙네의 간절함과 애틋함은 당에 좌정한 할망의 마음을 뒤흔들고도 남았을 것이다. 제주의 신을 할망이라고도 한다. 할망은 마을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마음을 풀어주는 자애로운 존재다. 천주교로 치면 신부(神父)인 셈이다. 천주교에서 신도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여인들은 시어머니 구박과 홀로 남은 친정어머니 생각에 설움을 풀어내던 장소로 당을 찾았을 거다.

바닷가 해신당에서는 바다의 신에게 바닷길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고 산신당에서는 들짐승 많이 잡게 해주고 가축의 새끼를 많이 낳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탐라국 시기부터 이어져 왔을 이런 소박한 신앙의 장소가 지금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유교 이념으로 무장한 조선시대 목사들에 의해 신당이 훼철되고, 19세기 말에 들어온 천주교의 횡포에 수난을 당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 전통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무자비한 파괴, 4·3의 불길,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8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의 ‘미신타파’를 겪으면서 옛 모습을 급격히 잃어가고 있는 거다.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것만이라도 눈에 넣자는 생각으로 몇 군데를 찍어 길을 나섰다.

첫 번째 들른 곳이 월평동에 있는 다라쿳당.

다라쿳은 월평동의 옛 이름이다. 제주중앙고등학교 정문 건너편에 있는 안내표지판 뒤로 올라서면 밭 건너편으로 큼지막한 팽나무가 그곳이 본향당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게 한다.

그러나 당으로 들어서면서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목으로 모시는 천선과나무가 한쪽으로 축 처진 채 기울어져 있고 걸어놓은 물색천도 누더기 같아 보였다. 신목은 땅에 뿌리를 두고 가지를 하늘로 향하여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를 연결하는 신성한 존재다. 급히 스마트폰으로 자료를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의 실수인지 의도인지 모르지만 지난 2017년에 신목인 천선과나무가 불에 탔다는 기사가 툭 튀어나왔다.

불에 타기 전(왼쪽)과 후(오른쪽)의 모습이 확연히 차이난다

집에 돌아와 예전에 찍어뒀던 사진과 이번에 찍은 사진을 비교해 봤다. 번창과 쇠락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이 다라쿳당에는 이름이 요상한 부부신이 나온다. 수렵과 목축을 주관하는 ‘산신백관 산신대왕’과 농사를 주관하는 ‘은기선생 놋기선생’이 그들이다. 얽혀있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노총각 수렵신 '산신백관 산신대왕'은 아리따운 농경신 '은기선생 놋기선생'과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혼인한다. 육식을 못하니 남편의 힘은 점점 약해질 수밖에. 그렇다고 고기를 구워 먹자니 부인에게 혼쭐이 날까 전전긍긍한다. 하루는 은기선생 놋기선생이 남편에게 묻는다. "당신 몸이 예전 같지 않네요." 고민하던 산신백관 산신대왕은 "돼지고기를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며 "고기 한 점만 먹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농경신에게 육식은 부정한 것. 부인은 "더 이상 한 집에서 살 수 없다"며 별거를 요구한다. 결국 돼지고기 냄새가 나는 산신백관 산신대왕은 바람 아래 자리 잡고, 정결한 은기선생 놋기선생은 바람 위에 자리 잡으면서 다라쿳의 수호신이 된다.」

신은 죽지 않는다지만 분노한 산신백관 산신대왕과 은기선생 놋기선생이 예전과 같이 마을 주민들에게 영험함을 보여줄지는 모르겠다.

쓸쓸한 마음으로 자리를 옮긴 곳은 새미하로산당이 있는 동회천 마을. 다라쿳이나 새미하로산이나 이름이 참 희한하다. 새미는 샘[泉]이 있다고 해서 붙인 동회천의 옛 이름이고 하로산은 한라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제주도가 지리적으로 육지와 떨어져 있는 데다가 출륙금지령에 묶여 200년을 외부와의 왕래가 거의 단절되었던 탓에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주장하는 설(說)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언어의 변화과정을 정확하게 고증하기는 어렵다.

새미하로산또의 신단수 / 신단수에 지전이 꽂혀 있다

봉개 방향에서 길을 따라가다 화천사를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이곳의 당신(堂神)은 ‘새미하로산또’인데 사냥을 하는 산신일월조상이다.

당 안내표지가 있는 입구에서 과수원을 통과해 100m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이 많은 팽나무가 신목으로 서있다. 특별한 시설물 없이 시멘트 제단이 있고, 나무의 갈라진 틈으로 물색천이나 소지 대신 천 원짜리 지전이 꽂혀있는 게 눈에 뜨인다. 대략 스무 장도 넘어 보인다. 함께 간 선배가 “이런 거 사진에 나오면 금방 없어질 것 같은데.” 하길래, “돈 빼간 사람들 모두 벼락 맞았다는 소문을 내면 괜찮을 걸요.” 하며 웃었다.

새미하로산당은 전국의 무속인들이 찾아와 소원을 비는 곳으로 소문이 났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요즘도 당굿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찾아간 와흘본향당은 새미하로산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가던 길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면 길가에 본향당이라고 흰색 글씨가 쓰인 돌이 있고 바로 안쪽에 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지만 입구가 자물쇠로 잠겨있다. 지난 2009년에 본향당에 불이 났다고 하는데 아마 그 후로 출입이 제한된 모양이다. 가던 날이 장날, 마침 일요일이라 어디 연락해 볼 곳도 없고 해서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당신(堂神)에게 고하고 키 높이의 담을 넘었다.

기세 좋게 가지를 뻗은 신목에 색깔 고운 물색천이 잔뜩 걸려있다. 널찍한 공간 주위로는 운동장 관중석 같은 콘크리트 제단이 길게 둘러싸여 있다. 제단 뒤로는 오래된 보호수가 몇 그루 있는데,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휘어지고 굽어져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지난 2016년에 태풍으로 팽나무 신목 한 그루가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서정승 따님아기를 모시는 제단 / 하로산또를 모시는 제단

와흘본향당은 특이하게도 제단이 두 개다. 하나는 하로산또를 모시고 다른 하나는 서정승 따님아기를 모시고 있다. 하로산또는 본향신이면서 산신이고, 서정승 따님아기는 산육신이면서 치병신이다. 산육신은 흔히 삼신할미라고도 하는, 아기를 점지하는 신이고 치병신은 병을 다스리는 신을 말한다. 둘이 부부신이라는 점이 다라쿳당과 같다. 여기서는 일년에 세 번 마을의 본향당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데 워낙 유명해서 많은 구경꾼들이 몰린다고 한다. 산 사람의 집이든 죽은 사람의 집이든 신(神)이 머무는 집이든 명당(明堂)이 있기 마련인가 보다.

닫힌 문을 몰래 넘어 들어가서 그런지 은근히 전해오는 짜릿함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송당본향당으로 향했다.

송당본향당은 당오름 입구에 있다. 주차장에는 석상이 줄 늘어서 있는데, 본향당 당신 백주또 여신과 소로소천국이 결혼해서 낳은 아들 열여덟과 딸 스물여덟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들은 제주도 전 지역의 마을로 흩어져 당신으로 좌정했기에 송당본향당은 제주도 각 마을 조상으로 여겨 ‘불휘공(태초의 뿌리)’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앞서 들렀던 새미하로산당과 와흘본향당의 당신도 이들의 자손이다.

본향당 경내로 들어가려면 송당리 사무소로 연락을 하라는 안내문이 있지만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전화를 받지 않아 또 다시 무단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들 열여덟 딸 스물 여덟 석상 / 송당본향당 당집

입구에서 산책로 같은 아름다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왼쪽에 제물을 준비하는 건물이 있고 앞쪽에 자그마한 당집이 나타난다. 당집 안에는 신앙민들이 바친 신의(神衣)·가락지·목걸이 등이 궤 속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문이 잠겨 볼 수는 없었다. 마을에서는 일년에 네 번 제를 지내는데 그 때마다 신의를 내걸어 굿을 한다고 한다.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신목과 물색천, 소지 등이 보이지 않고, 대신 선조를 모신 사당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밖으로 나오는 길 양편에는 동백나무가 열매를 주렁주렁 단 채 무성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동백기름이 그렇게 귀하다던데....” 선배가 한 마디 하길래, “그러면 짐 내려놓고 좀 따갑시다.” 하니 웃으며 앞서 간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 수산본향당은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그러나 어렵게 도착한 수산본향당은 한껏 부푼 우리들의 기대를 사정없이 꺾어버렸다. 잘 만들어 놓은 주차장 앞에 안내표지를 보니 100미터 거리에 당이 있다고 적혀 있기에 표시대로 갔지만 기역자 형태의 작은 창고 하나와 남녀구분이 되어 있는 화장실만 나타나고 더 이상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서성이다가 다시 돌아와 자세히 들여다본 표지판에 본향당의 주소지가 적혀 있기에 옮겨 적어 다시 건물로 가 살펴보니 거기에도 산성효자로 228-27(수산리)이라는 주소가 붙어 있어 본향당이 맞다 싶었다. 그러나 오래된 창고같이 생긴 건축물에는 당이 갖고 있는 고유의 기운은 고사하고 자물쇠로 단단히 잠긴 채 방치된 시설물 같이 스산한 분위기만 맴돌고 있다. 그때서야 문득 안내문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당집 제단에는 나무로 만든 신상 2개를 모시고 있다. 신상에는 남녀 구별을 하여 한복을 입혀 놓았으나 현재 신상의 목이 모두 잘려 머리 부분은 훼손된 상태이다...>

문이 왜 굳게 닫혀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아마 이 문은 한 해에 다섯 번 올리는 제일(祭日)에나 잠깐씩 열릴 거다. 본향당도 이제는 아무 때고 와서 마음 편히 기도하고 하소연하는 열린공간에서 점차 닫힌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안내표지 / 스산한 느낌이 드는 수산본향당

그동안 유교이념으로 무장한 조선시대의 목사와 일본제국주의자들, 산업화 과정에서의 풍조가 무속신앙을 파괴하는 주범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이들의 신앙을 이단시하는 일부의 광신도들과 무속신앙을 미신으로 여기는 이들, 제물과 촛불을 방치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당사자들, 그리고 놀 곳이 마땅치 않다고 본향당을 놀이터로 만들어버리는 일부 청소년들이 당의 문을 닫아걸게 만드는 주범이 되고 있다.

그리스 로마의 신전이나 일본의 신사, 그리고 저잣거리의 교회와 산속의 절이 당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앞으로 또 많은 문이 닫힐 것인지. 그러다 보면 제주의 무속문화는 박물관에서나 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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