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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칠궁 - 5장 퇴마사 최후의 결전 ③
  • 금강 작가
  • 승인 2019.05.1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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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흘 후, 오성그룹 이숙종 회장 집무실.

숙종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준이 풀려났습니다. 불구속 수사로 전환된 걸 보면 아마 봐주기로 끝날 것 같습니다.”

오전에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하나밖에 없는 핏줄을 죽인 살인자가 활개치고 다닐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놈을 눈앞에서 찢어죽이고 싶었다. 아내 명신도 함께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었다.

박준이 풀려난 건 명신의 짓이다. 숙종은 그렇게 단정했다. 권력이 뭔가. 숙종은 돈이 곧 권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내 명신은 아버지의 권력으로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

어디 할테면 해봐. 네가 감히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부친을 닮아 호령하기를 좋아하는 여자. 젊은 놈을 끼고 즐기면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는 여자. 그것도 모자라 목숨 같은 핏줄을 잔인하게 살해한 여자. 그런 여자가 자신의 아내라니 견딜 수가 없었다.

숙종의 턱에서 딱딱 소리가 났다. 중대한 결심을 할 때 버릇이었다. 숙종은 인터폰을 들었다.

“김실장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노크소리와 함께 김실장이 들어왔다. 숙종이 입을 열었다.

“이사회를 소집해. 이덕신을 물러나게 하고 등기이사직을 박탈한다. 오성건설 이창신도 대표이사직에서 해임해.”

“예에?”

‘뭘 그렇게 쳐다보나. 당장 이덕신 책상부터 치워.“

“그 그러면 이부회장님께서 반발하지 않을까요.”

“무슨 반발. 회사가 백척간두에 서 있는데 연봉만 축내고 하는 일이 뭐가 있나. 양심이 있으면 스스로 물러나야지.”

“그렇긴 합니다만 분란의 소지가 없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사회를 소집해 법적 명분을 갖추라고.”

“예 알겠습니다.”

“또 하나. 진돗개를 투입시켜. 진돗개 1이 가장 강력하지. 걔를 시켜. 작전명은 ‘개 도살’이다. 내 아들을 죽인 그 놈을 죽여. 똑같은 방법으로.”

“…….”

김실장은 입이 얼어붙은 듯 말을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숙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특수수사과 그 친구들 어떻게 됐나.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김훈 반장과 박찬일 경관은 변두리 경찰서로 좌천됐습니다.”

“정말인가. 확실해?”

“예. 박준 사건 정보를 알아보던 중 아는 치안감이 귀띔해줬습니다. 아무래도 미운 털이 박혀 쫓겨난 것 같습니다.”

“안됐군. 청렴하고 능력 있는 경찰인데.”

“예 저도 그 말 듣고 안타까웠습니다. 연락해서 자리를 곧 마련하겠습니다.”

 

이날 밤 서울 외곽 파출소. 경찰관 한 명이 책상에 엎드린 채 코를 곯고 있었다.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어 한 주정뱅이가 비틀거리며 파출소 안으로 들어왔다.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뭐야. 경찰이 민생치안은 안하고 자빠져 자냐.”

주정뱅이는 경찰관에게 달려들어 양 귀를 붙잡아 당겼다.

“좌회전! 옳지 우회전!”

주정뱅이는 운전대를 돌리듯 경찰관의 귀를 붙잡고 돌렸다. 경찰관이 잠에서 깼다. 경찰관은 사태 파악을 못한 듯 주정뱅이를 멍하니 쳐다봤다. 주정뱅이가 신나게 귀를 잡고 운전했다. 다음 순간 경찰관의 큰 머리통이 사정없이 주정뱅이의 면상에 꽂혔다.

“에라 이 주폭 양아치야.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넣기 전에 썩 꺼져.”

벌렁 넘어졌다 일어난 주정뱅이가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때, 말똥 계급장을 단 경찰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김훈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글세 내가 밖에서 보니까 경찰이 자빠져 자고 있기에 깨웠더니 날 들이받았어요. 잠을 깨워준 것도 공무집행 방햅니까.”

주정뱅이가 씨근덕거리며 맞섰다.

“그래 특수공무집행방해다 왜. 한 대 더 맞을래.”

“박경사 참아. 그리고 당신, 소동 피우지 말고 당장 나가요.”

주정뱅이가 박찬일을 째려보더니 바깥으로 사라졌다. 김훈이 말했다.

“피곤하면 들어가. 파출소 안에서 졸지 말고.”

“할 일이 없으니까 졸음이 오죠. 저런 주정뱅이들이나 상대하고 정말 못해 먹겠네요.”

“어쩌겠나. 민생치안 열심히 한다 생각해야지.”

“반장님. 아니 이젠 소장님이네요. 민생치안 그거 아무리 잘해봤자 소용없어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아지는 법 아닙니까. 박준 같은 놈은 살인미수에 흉악 범죄를 저질렀는데 위에서 풀어주라고 해서 풀어주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박준은 정권이 바뀌기 전엔 아무도 못 건드려. 그게 현실이야.”

“그래도 그렇지. 놈이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을 걸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집니다. 경찰 옷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내 손으로 그 놈을 꼭 잡아넣고 싶어요.”

“동감이야. 나도 그러고 싶지만 뾰족한 수가 있나. 수사권도 없고.”

“오성 김실장한테선 연락이 없습니까. 그 양반 나한테 피해자 진술 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전화가 왔어. 오성 이회장이 자네와 나 둘이 식사 대접하겠다는 걸 거절했어.”

“왜요.”

“생각해봐. 이회장이 납치사건의 당사자도 아니고 식사 대접받는 게 모양이 우습잖아.”

“그건 그렇죠. 그런데 말입니다. 장연아가 이회장의 내연녀가 분명한 것 같은데 그것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 보자는 거 아닐까요.”

“그래봤자 뭘 하겠나. 수사라인에서 배제됐는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경찰 배지 떼고 민간인 신분으로 조사해볼 생각이에요. 미국 영화 보면 사립탐정도 잘만 조사하던데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어요.”

“아서라. 그러다 변두리에서 섬까지 쫓겨날라. 그렇게 되면 박경사는 장가 한번 못 가보고 총각귀신이 될 거다.”

박찬일이 눈빛을 반짝 드러내며 말했다.

“반장님. 저 진심입니다. 제가 정말 사립탐정이 되면 어떻게 하실래요. 동참하실래요?”

“쓸데없는 소리. 나가서 동네 한 바퀴 순찰이나 돌고 오자구.”

“다 압니다. 말씀은 그리 해도 속마음은 저랑 같이 동참하고 싶죠. 솔직히 말해 보세요.”

김훈은 묵묵부답 삼단봉을 집어 들었다. 박찬일이 그 뒤를 따랐다.

 

이튿날 저녁 평창동 이덕신 자택. 넓은 거실에 이덕신부회장과 이창신 사장, 명신 셋이 머리를 맞댔다. 해임 통보를 받은 이덕신 형제가 명신에게 긴급 요청해 만난 자리였다. 이창신이 침을 튀겨가며 숙종을 성토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략이라더니 이게 웬 일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매형이 우리한테 이럴 수 있는 겁니까.

 

“그러게 말이야. 하루아침에 책상을 빼버리다니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손가락질 하겠나. 망신도 이런 망신은 없어.”

이덕신이 맞장구쳤다. 이창신이 명신의 눈치를 보며 재차 말했다.

“회사 사람들 보기도 창피합니다. 이젠 꼼짝없이 집에만 처박혀 있게 생겼어요. 누님 어떻게 손 좀 써주세요.”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하지. 회사가 어렵다면서 월급은 왜 그리 많이 가져가.”

“제 월급은 어떻게 아세요.”

“듣는 귀가 있어. 잘못된 인사라고 따지고 싶어도 명분이 있어야 따지지. 회사 여직원도 성추행했다면서. 그런 짓을 왜 해.”

“그게 아니고 누님 이건 분명 보복인사예요. 그 여자 때문에 매형이 화가 나서 우릴 내쫓았다구요.”

“입조심해. 그 얘긴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했지.”

명신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이덕신이 말했다.

“어쨌거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방법을 찾아야지.”

“이럴 땐 공격이 최선의 방어예요. 형님, 혹시 회장이 꼼짝 못할 약점 알고 있는 거 있습니까.”

“짐작이 가는 데는 있어. 회장이 은밀하게 비자금을 조성한 것 같은데 증거가 있어야지. 비서실장은 알건데 그 놈은 회장 편이니.”

“한번 구워 삶아볼까요. 저한테 총알이 좀 있어요.”

밀담이 계속되자 명신이 벌떡 일어섰다.

“누님 어디 가세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그이가 올 시간이야. 가봐야 돼.”

“제 거취는 어떻게 됩니까. 이대로 속수무책 기다릴 수는 없어요.”

“기다려. 나도 화가 나서 더 이상 못 참겠어.”

 

30분 후 명신은 성북동 집에 도착했다. 거실에 들어서자 숙종이 흘낏 노려봤다.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명신이 대뜸 쏘아부쳤다.

“왜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쳐다봐요. 내가 뭘 잘못한 게 있어요.”

“뻔뻔스럽군. 몰라서 묻나.”

명신이 즉답을 않고 숙종을 치켜봤다. 팽팽한 긴장감이 어렸다. 숙종이 말했다.

“납치건 당신이 시킨 것 아냐.”

“몰라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증거가 있음 대보세요.”

“박준이 체포됐다 풀려난 거 당신 소행인지 알아. 내 돈으로 그 놈한테 비싼 옷 사준 것도 알고. 그 놈하고 무슨 관계야.”

“흥 사돈 남 말 하시네.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인 줄 알아요. 새파랗게 젊은 년하고 바람이나 피는 주제에.”

명신은 안하무인으로 나왔다. 숙종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참았던 말을 기어코 꺼내고야 말았다.

“그래서 죽였나?”

“누굴 죽였다는 말이에요. 생사람 잡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 내 친정식구들 왜 내쫓았어. 사전에 나한테 말은 해 주는게 부부간에 예의 아닌가요. 그러고도 당신 무사할 것 같아요.”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 아니라 내 권리를 말하는 거예요. 오성이 이만큼 큰 게 누구 덕분이에요. 당신이 잘 나서? 착각하지 말고 당장 복귀시키세요.”

“못해 절대로.”

숙종과 명신의 눈빛이 엉켰다. 둘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숙종이 품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툭 던졌다. 명신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명신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 변했다.

“이혼서류군. 흥 이런다고 내가 겁먹을 줄 알아요.”

“좋게 말할 때 도장 찍어. 아니면 국물도 없을 테니.”

“해 볼테면 해봐요. 누가 손핸지 보게.”

“명심해. 발표 시점은 1년 후다. 그때까진 비밀로 해.”

“왜 우리 아버지가 무서워요? 이제 퇴임이 1년이 채 안 남았으니 그때까지 묻어두자는 건가요. 아버지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친정 식구들은 왜 내쫓았어요. 캥기는 데가 있나 보죠.”

“이유를 말해줄까. 한마디로 무능력하고 부도덕해.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이미지에 먹칠을 했어. 손해배상 청구를 안 하는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

“그래요? 부도덕한 건 당신하고 똑 닮았네요. 어디 두고 봅시다. 누가 이기나.”

명신은 쌩 하니 거실을 나갔다.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져 쓰러질 것 같았다. 바깥으로 나왔다. 별채가 보였다. 명신은 안으로 들어갔다. 영명이 단정한 자세로 맞이했다. 명신은 곧바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남편이 이혼을 하자는군. 어쩌면 좋지.”

영명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안됩니다 사모님. 이혼은 피해야 합니다. 지금 이혼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형국이 됩니다.”

“그럼 어떻게.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나. 친정 식구들 다 내쫓고 나더러 이혼서류에 도장 찍고 나가라는데 이대로 죽은 듯이 지내야 돼?”

“아닙니다. 지금 사모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장희빈의 혼령이 사주해 일으킨 것입니다. 이번 일을 겪으며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장희빈의 영기가 너무 강합니다. 그 영기를 꺾어놔야지 그렇지 못하면 더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하나. 갖은 수단을 다 썼지만 안 되고 그 깊은 절벽에서도 살아났는데.”

“염려 마십시오. 장희빈의 준동은 제가 막을 테니 사모님께선 다른 방도를 찾으십시오.”

“다른 방도라니. 비책이라도 있나.”

“일단 회장님의 제안을 거부하십시오. 홧김에 도장을 찍었다간 평생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편이 낫습니다.”

“우회적? 오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최실장은 그년을 꼭 막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둘이 붙어사는 꼴은 절대로 못 봐.”

명신이 별채를 나가자 영명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나야. 지난번에 봤던 그 장소로 와. 지금 출발해.”

 

한시간 후 워커힐호텔 펄 빌라. 영명이 벨을 누르자 안에서 문을 열었다.

“누님. 어서 오세요”

박준이었다. 영명이 응접실 테이블에 앉으며 말했다.

“어때. 요 며칠간 정신이 없었지.”

“네. 꼼짝없이 감옥에서 썩는 줄 알았습니다. 실은 지금도 많이 불안해요.”

“걱정 마. 내가 널 지켜줄 테니.”

“하지만 찝찝해요. 여자가 재판에 나와서 불리한 증언이라도 하면 그땐 어쩝니까.”

“염려말래도. 장연아는 절대로 재판에 나오지 않아.”

“피해자인데 가만히 있겠어요. 잡아먹으려고 덤빌 텐데.”

“그러기 전에 수를 써야지. 장연아를 조종하는 건 장희빈이야. 장희빈의 영이 빠져나가면 기억도 못할 걸.”

“누님. 전 믿기지 않습니다. 대명천지에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겪어보고도 모르나. 장연아가 절벽에서 어떻게 살아났다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저도 그 점은 정말 수수께끼예요.”

“영이 장연아의 몸을 끌고 올라간 거야. 아니면 그 높은 벼랑 끝으로 어떻게 올라갔겠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장희빈 영을 없애. 그렇게 해야 네가 살고 사모님도 안전하게 돼. 알겠니.”

“싫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와서 발을 빼면 어떻게 해.”

“누님.”

박준이 영명을 은근하게 불렀다. 그리곤 영명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영명은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누님. 그러지 말고 우리 조용히 사라져요. 아무도 못 찾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요. 네.”

영명은 대답 대신 박준을 빤히 쳐다봤다.

이 남자. 젊고 잘 생긴, 목표를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인, 그러면서도 매력적인 남자. 박준을 처음 봤을 때였다.

“인사들 해. 이 사람은 내 보디가드.”

명신은 박준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준입니다.”

박준이 늠름한 자세로 깍듯하게 인사했다. 명신은 그런 준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 젊은 사람이 매너도 좋고.”

그 순간 눈치 챘다. 명신이 준에게 푹 빠져있음을.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문제는 박준의 행동이었다. 자주 얼굴을 보면서 친분이 쌓이자 박준이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한번은 명신이 집을 비웠을 때 불쑥 별채로 찾아왔다. 손에 먹을 것을 들고 있었다.

“이거 드셔 보세요. 아주 맛있습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먹을 것도 커피, 아이스크림, 빵 등 종류가 다양했다.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러지. 의도가 있나.

처음엔 의심이 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남자의 순정이라더니 준이 그랬다.

“누님,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같이 영화 보러 가요.”

그렇게 묻는 준의 표정은 들떠 있었다. 연정을 품은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말과 행동이었다. 그런 어느 날 별채에 단 둘이 있었을 때였다. 준이 갑자기 달려들어 포옹했다. 숨이 막혔다. 이대로 품에 안기고 싶었다. 흥분한 준은 열정적으로 덤벼들었다.

“그만.”

벌떡 일어났다. 마지막 선을 넘지 않은 것은 명신을 의식한 때문은 아니었다. 냉철한 영이 시킨 것이다. 준의 애정 공세는 이후에도 은밀히 지속됐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럴 적마다 영이 자제를 시켰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룸서비스입니다.”

준이 문을 열었다. 룸서비스가 주문한 요리를 내려놓고 나갔다. 준이 스테이크를 알맞게 자른 뒤 영명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누님이랑 꼭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어딘지 아세요.”

영명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준이 들뜬 나머지 마구 떠들었다.

“코스타리카예요. 니카라과와 파나마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죠. 사진으로 봤는데 해변이 아주 죽여주더라고요. 코스타리카 어원이 풍요로운 해변이에요. 영화 쥬라기공원도 거기서 촬영했죠. 또 있어요. 코스타리카는 지구에서 필요한 산소의 5 %를 만들어내죠. 그러니 얼마나 공기가 깨끗하겠어요. 어때요 누님. 이만 하면 내가 누님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시겠죠. 거기서 살 돈도 마련해놨어요. 누님은 몸만 가면 돼요.”

박준은 계속 유혹했다. 영명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안돼. 난 여기서 할 일이 있어.”

“무슨 할 일이요. 사모님 뒷바라지 하는 거요. 난 지쳤어요. 이젠 돈도 싫고 다 싫단 말입니다. 나한텐 누님 한 분만 있으면 돼요. 지금 떠나면 재판도 받을 필요 없고 홀가분하게 둘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요.”

“사모님께서 그 말 들으면 실망하실 거야. 사모님이 널 얼마나 아껴주시는데 그렇게 말하면 되니.”

“알아요. 하지만 내 맘은 오직 누님뿐이에요. 지금 이대로는 불안해서 못 살겠어요.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다고요.”

대화는 계속됐다. 준은 결심을 굳힌 듯 물러서지 않았다. 영명은 고심 끝에 말했다.

“알았어. 네가 정 원하면 그렇게 하지.”

“정말입니까 누님.”

“약속해. 대신 마지막으로 임무를 수행해줘.”

“무슨 임무를.”

“칠궁에 잠입해서 양밥을 달아. 먼저 번 그 장소에.”

“그건 이미 실행했지 않습니까. 왜 또 달아요.”

“없어졌어. 그게 장희빈 기를 누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라져버렸어. 그래서 장희빈이 준동하는 거야.”

“그거 쉽지 않은데. 지난번에도 아주 애를 먹었었다구요.”

박준은 대빈궁을 떠올렸다. 기둥에 올라 양밥을 달 때였다. 갑자기 광풍이 불더니 얼굴을 때렸다. 그뿐 아니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옷을 잡아당겼다. 깜짝 놀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진땀이 났다. 영명의 지시가 떠올랐다.

“명심해. 방향이 틀리면 안돼. 신실을 마주 보게 달아. 꼭.”

가까스로 양밥을 신실 방향으로 고정시켜 놓고 기둥을 내려왔을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까마귀 떼들이 몰려들었다. 까마귀들은 까악 까악,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대빈궁 주위를 선회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지금까지 청와대에 근무하며 저렇게 많은 까마귀떼를 본 건 처음이었다.

“왠지 께름직 해요.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박준은 망설였다. 영명이 품에서 양밥을 꺼냈다.

“받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10분 뒤 펄 빌라를 나온 박준은 집에 도착했다. 벽시계를 봤다.

9시 20분. 아직 이른 시간이군.

박준은 중얼거리며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청와대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경찰의 눈을 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대빈궁 기둥 위에 양밥을 매다는 건 만만찮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뭔데 누님은 기를 쓰고 하라는 건가.

박준은 양밥을 찬찬히 살펴봤다. 전엔 무심코 봤던 인형이 자세히 보니 흉측하게 생겼다. 뾰족한 뿔이 네 개나 달렸고 눈이 산 사람처럼 살아 움직이며 노려보는 것 같았다. 계속 보고 있자니 속까지 메스꺼워졌다.

눈을 감았다. 영명의 고요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 눈을 마주보고 있노라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가라앉았다. 명신은 그렇지 않았다. 매사에 불이었다. 아랫사람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호령을 내리고 성에 차지 않으면 여지없이 내쫓았다. 자신을 먼저 유혹한 것도 명신이었다. 두려워서 하자는 대로 따랐고 지금까지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종은 종일뿐이다. 명신이 자신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종으로서다. 종이 그녀에게 행복을 주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종에게 행복을 주진 않았다.

준은 양밥을 만지작거렸다. 영명이 마지막 당부가 생각났다.

그래 누님은 지금까지 약속을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어. 이번 일을 잘 처리하자. 그런 뒤에 내가 원하는 길을 가는 거야.

자정이 넘자 박준은 일어섰다. 양밥과 끈, 볼펜 손전등, 그밖에 필요한 도구를 꼼꼼히 챙긴 뒤 바깥으로 나왔다. 주차장으로 갔다. 리모컨을 눌렀다. 그때였다.

“박준.”

뒤로 돌아봤다. 강력한 펀치가 얼굴에 작렬했다. 박준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 <칠궁>은 매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작가 소개>

금강(錦江·필명) 웹소설 작가. 시나리오 작가 겸 문화평론가

금강 작가  e-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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