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정해우(庖丁解牛)=포정이라는 백정이 신기(神技)에 가까운 칼솜씨로 소의 뼈와 살을 발라내다. 입신의 경지에 이르면 소를 잡아도 마치 춤을 추는 듯하고, 칼질하는 소리도 리드미컬한 게 마치 음악과 같다. 동작 하나하나가 기술을 넘어 예술이 되고, 도(道)가 되는 것이 모든 무예의 궁극점이다.

 

고수는 고수를 한눈에 알아본다. 바둑의 고수는 바둑돌을 놓는 손 맵시만 봐도 상대의 기력(棋力)이 어느 정도인지를 간파한다. 씨름의 고수는 샅바 잡는 것만 봐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검의 고수는 칼끝이 스쳐간 자국만 봐도 상대의 무예가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알아챈다. 일본 최고의 검객으로 꼽히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작약 꽃 일화가 그것을 보여준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말년에 저술한 <오륜서(五輪書)>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오륜서>는 <손자병법>과 함께 동양의 2대 병서(兵書)로 꼽히는 고전이다.

“나는 일찍이 검술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고 열세 살 때 처음으로 승부를 가렸다. 그때부터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여러 유파의 이름난 무예자와 60여 차례 승부를 겨뤘으나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강호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조리 그가 휘두른 칼에 추풍낙엽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사시의 작약 꽃 일화를 보면 이렇게 화려한 불패신화에는 가려진 부분도 있다. 뭇 고수들을 꺾음으로써 자신의 이력을 써나가던 방랑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는 당대 최고의 검객으로 이름이 높은 야규 세키슈사이(柳生 石舟齊)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세키슈사이는 감기를 내세워 시합을 거절하면서 사과의 뜻으로 작약 한 송이를 직접 칼질해 보냈다.

 

작약을 받은 무사시는 꽃줄기가 잘려나간 부분을 살펴보다가 문득 “아!” 하는 탄식 소리와 함께 고개를 떨궜다. 세키슈사이의 칼끝이 스쳐간 자리에는 범접할 수 없는 고수의 면모가 번뜩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검술의 새로운 경지를 엿본 무사시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임을 깨닫고 시합도 하지 않은 채 패배를 자인한 뒤 다시 수행의 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검의 고수는 검으로 말한다. 작약 꽃을 벰으로써 무사시의 오만을 베어버린 세키슈사이는 신카게류(新陰流) 검법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신카게류의 최고 경지는 무검(無劍)의 위(位)로서, 칼이 없는 맨손으로도 상대를 제압해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고된 수행 끝에 무검의 경지를 터득한 세키슈사이는 등 뒤에서 기습해오는 칼을 맨손으로 물리치기도 했다고 한다.

 

세키슈사이와 같은 고수의 경지에 이르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상대를 벨 수가 있다. 작약 꽃으로 감쪽같이 미야모토 무사시의 콧대를 베어버린 것이 그 한 예이다. 칼을 들지 않는 무검은 상대를 죽이는 살인도(殺人刀)가 아니라 생명을 보전케 하는 활인검(活人劍)이라고 할 수 있다. 세키슈사이가 검으로 꽃대를 잘라 화병에 꽂아두면 시들어가는 꽃도 소생했다고 한다.

 

입신의 경지라 할 이런 검술은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포정해우’는 <장자> 양생주(養生主)편에 나오는 우화인데, 내용이 길므로 세 부분으로 나눠 살펴보자.

 

포정(庖丁)이라는 백정이 임금인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았다. 그런데 그 솜씨가 가히 예술이었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대고, 발로 디디고, 무릎으로 누를 때마다 푸덕푸덕 살과 뼈가 떨어졌다. 칼날이 지날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게 아주 리드미컬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춤을 추는 듯 우아했고, 들리는 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음악 같았다. 문혜군이 감탄하여 외쳤다.

“야! 정말 대단하구나! 어떻게 하면 기술이 저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문혜군에게 대답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지요.”

 

임금이 포정의 예술을 방불케 하는 기술을 보고 감탄하는 대목이다. 포정은 자신의 칼솜씨가 어떻게 도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 제가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자 소의 겉모습은 보이지 않고 자를 부위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저는 눈으로 소를 대하지 않고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눈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을 따라 칼을 놀리는 것이지요. 소의 몸이 생긴 대로 그 빈틈을 찾아 칼을 찌르고, 구멍으로 쪼갭니다. 그러면 소와 내가 한 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칼을 움직이니 뼈와 살을 잘못 건드릴 리가 없지요.”

 

포정의 말에 따르면 소 잡는 기술에는 세 단계가 있다. 먼저 1단계는 눈에 들어오는 대로 소의 겉모습을 보는 경지다. 이때는 칼과 힘에 의지하여 소를 도살하게 된다. 2단계는 소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경지다. 즉 부위 별로 급소와 살결이 눈에 들어오는 단계로, 칼질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그 다음 3단계는 마음으로 소를 보는 경지다. 즉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서 도살할 소를 의식하지 않는 단계로, 마음이 가는 대로 물 흐르듯이 칼질을 하니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춤을 추는 듯이 아름답다. 포정은 이렇게 도의 경지에 이르면 칼날이 하나도 닳지 않는다고 말한다.

 

“훌륭한 백정은 1년에 한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한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뼈를 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19년 동안 이 칼로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는데, 칼날이 방금 숫돌로 갈아낸 듯이 시퍼렇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는데, 이 칼날은 아주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칼날은 뼈마디의 틈새를 여유롭게 지나갑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났어도 칼날이 전혀 닳지 않고 새것인 것입니다.”

 

포정의 설명을 다 들은 임금은 “훌륭한지고! 나는 오늘 양생의 도를 깨달았도다” 하고 무릎을 쳤다. <장자>는 소를 죽이는 우화를 가지고 그것이 생명을 북돋우는 양생의 도라고 말하고 있다. 앞서의 이야기에서 작약 꽃을 자른 검이 시든 꽃을 소생시켰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흥미롭게도 포정이 소를 대하는 3단계 과정은 미야모토 무사시가 검법에 눈을 떠가는 과정과 닮아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13세 때 첫 결투를 치른 뒤 20대 때까지 천하를 떠돌며 진검승부로 몸을 단련해 나갔다. 29세 때 일생일대의 라이벌 사사키 고지로를 꺾은 뒤 더 이상 피를 부르는 진검승부를 하지 않고 성찰과 수련을 통해 검법의 도를 추구했다. 그리고 50세에 이르러서는 칼과 몸이 하나가 되는 ‘선검일여(禪劍一如)’의 깨달음을 얻고 모든 것을 텅 비운 ‘공(空)’을 말하게 됐다. ‘포정해우’의 우화에서 본 대로 도에 눈을 뜨는 3단계 과정과 비슷한 경로를 밟아간 것을 알 수 있다.

 

무사시는 마음 수련에 대해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한 적이 있다. 한 방문객이 검술연마에 대해 묻자 그는 방바닥에 깔린 다다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다다미 가장자리를 밟고 걸을 수 있겠지요?”

“그야 어렵지 않지요.”

“그 가장자리 폭만큼 좁다란 외나무다리가 높은 담벼락에 걸려 있다고 칩시다. 건널 수 있을까요?”

“글쎄요. 건너기 어렵겠지요.”

“그럼 그 다리 폭이 세 배로 늘어났다고 치면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건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다리가 수백 길 낭떠러지 사이에 놓여 있다고 치면 건널 수 있을까요?”

“아찔해서 도저히 못 건널 것 같네요.”

“다리 폭은 똑같은데도 놓인 장소에 따라 걸음이 달라집니다. 두려움과 같은 잡념 때문에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잡념을 떨치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바로 검술 수련입니다.”

 

<오륜서>에서 무사시는 병법의 마지막 도리로 ‘공(空)’을 꼽으면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공은 시작도 끝도 없고, 겉과 속도 없다. 그래서 도를 터득했다고 해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병법의 도는 자연의 도다. 자연에 몸을 맡겨 때와 장소에 따라 그에 합당한 박자를 깨우치면 저절로 적을 이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의 경지이다.”

 

무사시가 말하는 공의 경지는 ‘포정해우’의 우화에서 포정이 말하는 도의 경지와 일치한다. 처음에는 소가 소로 보여서 칼을 휘두를 때 힘이 들어가게 돼 있다. 그 다음 단계로 소가 더 이상 소로 보이지 않고, 소 내부가 눈에 들어오면 기술로써 능숙하게 칼을 다루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의 눈을 떠서 소를 보게 되면 칼을 놀리는 동작 하나하나가 춤이 되고 음악이 된다. 칼솜씨가 기술을 넘어 예술이자 도(道)가 되는 것이다. 바로 미야모토 무사시가 말하는 공의 경지이고, 바둑의 위기구품이 가리키는 입신의 경지이다.

 

<오륜서> 공의 장에서 무사시는 “도리를 얻은 뒤에는 도리를 내려놓고 손에 검을 들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고 말한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지고 가는 게 아니라 버리고 가고(登岸捨筏), 높은 누각에 올랐으면 사다리는 치워버리고(登樓去梯) 더 이상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입신은 도의 경지이므로 말보다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이제부터는 천만 마디의 말이 잠꼬대요, 헛소리에 불과하다. 조주선사(趙州禪師・778~897)의 선화로 수졸에서 입신까지의 긴 여정을 마감하고자 한다.

 

젊은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말했다.

“큰 스님, 저는 마음을 비웠습니다. 제 마음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게 없습니다.”

“뭐가 없다고?”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게 없다고요.”

“그래? 굉장한 것을 걸치고 있구나!”

 

또 다른 젊은 스님이 말했다.

“큰 스님, 저는 다 버리고 물건 하나도 들고 있지 않습니다.”

“내려놓아라.”

“아니, 든 것이 없는데 뭘 내려놓습니까?”

“그럼 계속 들고 있거라!”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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