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군 케네스 그릭스 망명실화, 작품으로 탄생

장편 소설 ‘총구에 핀 꽃’은 한국계 미군의 망명 과정을 추적한,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융합된 작품이다. 이대환 작가는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핀란드, 스웨덴, 폴란드까지 기차와 선박으로 돌아다니고, 홋카이도 변두리까지 세계 동서를 오가며 취재했다.

‘총구에 핀 꽃’에 대해 평론가 정은경은 “최인훈 ‘광장’의 세계사적 버전”이라고 평했고, 해설을 붙인 평론가 이경재는 “전쟁을 낳는 근원적인 세계의 작동원리로서의 국민국가와 그것을 넘어선 평화의 가능성까지 진단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평했다.

작품 속 손진호는 실존 인물인 한국계 미군 김진수(미국명 케네스 그릭스)가 모델이다. 김진수는 베트남전에 징집된 미군 병사로 1967년 주일쿠바대사관으로 망명해 스웨덴에 정착했다. 작가는 비밀해제된 한국의 외교문서와 김진수의 삶을 추적한 기사 등을 참고자료로 삼고, 김진수가 걸어간 여정을 발로 추적했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은 햄릿의 문제였습니다. 죽이느냐 살아남느냐. 이것은 윌리엄 일병의 문제였습니다. 더 죽여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앞길을 막아선 이는 피투성이 어머니였습니다. …더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보다 더 절박한 문제는 반드시 온전한 개인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가의 말이다. 한국과 일본 당국은 당시 김진수가 공산국가로 가는 걸 막으려 했고, 옛 소련이나 북한은 그를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한 영웅으로 치켜세우면서 데려가려고 노력했다. 결국 김진수가 선택한 곳은 스웨덴이었다.

<이코리아>는 이대환 작가의 인터뷰를 싣는다. 이 작가 인터뷰는 김형욱씨(도서출판 아시아 편집장)가 진행했다.

146×206|360쪽|15,000원|2019년 4월 3일

김형욱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은 손가락으로 나누는 대화를 몹시 싫어하시고 지금 포스텍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에 계시니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총구에 핀 꽃』의 ‘작가 후기’를 보면, 2016년 11월 『박태준 평전』(1,031쪽)을 완결한 직후부터 이 소설에 본격적으로 덤볐다고 돼 있습니다만, 작품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동기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이대환 장편소설 『붉은 고래』(전3권, 2004)를 내고 뜻밖의 인연을 맺었던 두 문학인이 일본의 오다 마코토(小田實, 1932-2007) 작가와 한국의 고은 시인이었어요. 오다 선생은 그 책에 표4 글을 써주셨고, 고은 선생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서 “방금 다 읽었다. 아주 장하다.”며 한잔 사겠다고 하셨지요. 그즈음에 오다 선생이 포항을 방문했는데, 김진수 얘길 들려줬어요. 쩌릿한 전율이 스러지기 전에 “김진수를 소설 속에도 살아가게 하겠다”고 어설픈 약속을 했었지요.

김형욱 15년 동안 잊지 못할 친구나 연인처럼 가슴에 품었다고 하셨던 말씀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작품 구상이나 취재는 어떻게?

이대환 오다 선생은 몇 년 뒤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지만 약속은 거지와 했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니….『박태준 평전』을 보완하는 동안이나 ‘박태준연구서’들을 진행하면서 틈틈이 김진수를 생각했지요. 그의 궤적을 줄거리로 삼되 김진수는 손진호로 거듭나야 하니까 작가의 상상력이나 정신을 담아낼 허구를 창조해야 했겠지요?

일본 고베 인근 효고현 아시야시, 오다 마코토 문학비. “인간은 모두 거기서 거기다”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총구에 핀 꽃』에서 오다 마코토는 ‘선생님’이라 호명되며, 미망인(자이니치)은 ‘강 여사’로 등장한다. 이대환 작가와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이경재 교수는 오는 5월 초에 『총구에 핀 꽃』을 이 문학비에 헌정하러 갈 계획이다.

김형욱 이 소설에서 손진호의 아들이자 서울에 유학하는 작가 지망생인 손기정의 발화(發話)를 통해 선생님은 소설의 허구라는 수단과 역할에 대해 정의를 내려놓으셨더군요. 이렇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의 이름으로도 능수능란 발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작가입니다. 그 수단이 허구라는 것이고, 허구란 바로 작가의 상상력을 담아내는, 작가가 자유자재 변형할 수 있는 그릇이고, 그 그릇이 최후로 담아내야 하는 실체는 어떤 사실들의 배후를 관장하는 진실과 그 진실의 핵을 이루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소설이 뭔지, 허구가 뭔지, 진실이 뭔지, 그 진정한 문학혼과 작가정신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이대환 김진수에 대한 정보들로는 ‘작가 후기’에 밝혀둔 그대로 한국 외교부의 비밀해제 문서인 ‘김진수 한국계 미군 주일쿠바대사관 망명사건: 1967-68’, 《한겨레21》고경태 기자의 추적기사, 주일쿠바대사관 망명 9개월 만에 유폐생활을 끝내고 바람처럼 나와 버린 김진수를 숨겨줬던 작가 홋타 요시에의 소설 「이름을 깎는 청년」, 흑인 탈주병 테리 휘트모어의 회고록 등이 유용했어요. 다시 오다 마코토로 돌아가면, 선생은 60년대에 하루 1달러로 세계 여행을 감행한 뒤 『무엇이든 봐주련다』라는 여행기를 펴내 그때 일본사회를 들썩이게 만든 작가였고, 그 유명세를 상업적으로 쓰지 않고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헤이렌)’이라는 반전평화 시민운동에 쏟았습니다. 홋타 요시에도 베헤이렌의 일원이었지요. 오다 마코토는 김진수를 미군 탈주병 다섯 명과 함께 홋카이도-소련-스웨덴 루트로 망명을 시켰으니, 김진수와는 각별한 인연이었지요.

김형욱 김진수의 발자취를 따라 취재여행도 하셨다고요?

이대환 휴가를 다 쏟아부었지요. 요즘 세상에서 가장 비자본주의적인 노동이 뭐냐? 소설 쓰는 겁니다. 잘 팔리는 극소수의 소설가, 즉 독서시장에 유명 브랜드처럼 버티는 그 극소수는 예외지만, 물론 그들도 그걸 유지하려고 온갖 애를 쓰겠지만, 대다수 작가들의 소설 노동은 자본주의 논리에 어긋나는 거지요. 거스른다고 표현하면 위안이 될까요?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핀란드, 스웨덴, 폴란드까지 기차와 선박으로 돌아다니고, 홋카이도 변두리를 기차로 돌았습니다. 그것도 여행 아니냐 해버리면 그만이긴 한데, 무슨 비즈니스 개념에 대입해보면, 시간과 공력과 사유는 덮어두더라도 소설책이 몇 권이나 팔려야 그 비용을 건지겠어요? 시장경제의 논리에서 따지자면 소설 노동은 말짱 헛것인 거죠.

포스텍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 앞 ‘박태준 흉상’ 곁의 이대환 작가. 그는 십여 년을 들여 한국 평전문학의 수작으로 꼽히는 『박태준 평전』을 완결한 뒤, 2016년 겨울부터 장편소설 『총구에 핀 꽃』을 구상했다.

김형욱 “가장 비자본주의적인 노동이지만 반드시 기억해줘야 하는 인생이 있고, 작가는 그런 인물을 창조해야 한다.” 선생님이 지난 8일 기자간담회 때 하셨던 말씀인데, 그 비자본주의적 노동의 구체적 실상 하나를 알려주셨군요. 소설 얘기도 조금 하시지요. 김진수와 손진호, 둘 사이에는 어떤 결정적인 격차가 있습니까?

이대환 닮은 것부터 말하면, 한국전쟁의 고아, 미국 입양, 미군으로 베트남전 참전, 휴가 중 주일쿠바대사관 망명, 유폐생활, 소련을 거쳐 스웨덴에 정착, 이러한 줄거리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격차도 많지요. 아, 이건 문학평론가 이경재 교수가 책 뒤에 붙여놓은 ‘해설’에 잘 정리돼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좋은데, 특히 김진수와 달리 손진호는 피란길에 어머니가 포탄을 맞고 즉사한 기억을 간직한 채 송정원에서 성장하지요. 이것이 미국에서 히피운동을 받아들인 것과 함께 ‘미군 병사 손진호’의 정신적인 두 축이 됩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대척점에 평화의 고향처럼 비쳐지는 곳이 ‘송정원’이고, 히피의 꽃은 평화의 상징이지요.

김형욱 소설에서 송정원은 송정수녀원과 송정고아원을 일컫는 명칭입니다. 그 위치가 포항 영일만 바닷가 고요한 마을인데, 지금은 포항제철이 들어선 그곳이 선생님의 고향마을이고 실제로 송정원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대환 김진수는 전후에 서울의 고아였지만, 나는 손진호를 고향마을의 송정원에 데려다놓았지요. 소설에도 잠깐 언급되지만, 1968년 포항제철이 마을들을 철거한 당시 송정원은 수녀 150명이 500명 고아들을 돌봐주는 공동체였지요. 가난했지만 평화로웠던 고향마을에다 손진호의 순정한 추억들을 아로새겨줬습니다. 한국전쟁의 고아, 베트남전 참전의 입양청년, 자신에게 덮씌워진 그 전쟁의 운명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평화의 삶을 개척해 나가자면 피란길에 포탄을 맞고 즉사한 어머니, 얼굴도 모르겠고 오직 피투성이 가슴으로 남은 어머니만으로는 부족했을 겁니다. 총구에 꽃을 피울 만한 아련한 추억들과 정신을 더 갖추고 있어야지요.

‘총구에 핀 꽃’ 저자 이대환 작가.

김형욱 소설의 바닷가 마을에서는 최영희와 송기수, 그리고 ‘흰 수염 푸른 눈 신부’가 주요 인물이지 않습니까?

이대환 최영희는 송정원에서 샛노랗게 물들이는 손진호의 첫사랑, 송기수는 송정분교의 단짝으로 노고지리를 잡아 손진호에게 선물한 친구, 일부러 이름을 지워버린 ‘흰 수염 푸른 눈 신부’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손진호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지요.

김형욱 소설에서는 노고지리와 신부님의 상징적 의미가 큰 것 같았습니다.

이대환 어린아이의 손에 생포됐던 어미 노고지리처럼 손진호는 주일쿠바대사관에서 국가의 그물에 걸려 9개월이나 유폐를 당하지요. 거기서 손진호는 송기수가 생포해줬던 노고지리 기억을 떠올리고, 내가 노고지리를 놓아준 것이 아니라 노고지리가 스스로 자신의 손을 떠났던 것이라고 깨닫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향한 또 하나의 모험을 결심한 순간이었지요. 흰 수염 푸른 눈 신부, 이름을 없애버린 그는 국가 영역을 초월한 존재이고요.

김형욱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해 주시지요. 신작 ‘총구에 핀 꽃’이 이제 막 세상에 나왔는데, 작가 입장에서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대환 오래 품었던 인간을 세상 속으로 내보내서 한편 홀가분합니다. “국가나 거대폭력이 평화를 파괴할 수 있지만, 작은 인간의 영혼에 평화가 살고 있다면 평화는 패배하지 않는다.” 손진호의 그 신념이 휴전의 분단체제를 종전의 평화체제로 전환하려는 우리 시대에 소중한 정신으로 자리 잡기를 희원하면서, 그들 ‘작은 인간’의 영혼과 더불어 이제는 손진호의 젊은 날들이 좀 편안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손진호가 시들지 않는 평화의 꽃으로 우리 영혼에 길이 피어나게 하는 길이니까요.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