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할마(盲人瞎馬)= 맹인이 외눈박이 말을 타고 간다. 그것도 캄캄한 밤에 깊은 물가에서. 위태로워 보이는가? 그것은 옆에서 보는 사람의 생각이다. 정작 맹인 자신은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 보여서 겁이 난다면 눈을 감아라. 고수는 제대로 보기 위해서 눈을 감는다.

 

진(晉)나라에 고개지(顧愷之)란 사람이 있었다. 그림이 뛰어나고 학문도 높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성품도 소탈하여 우스갯소리로 주위를 웃기곤 했다. 하루는 친구들과 어울려 담소하다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짓이 어떤 것이냐’ 를 놓고 우스개 한마디씩 하기로 했다. 먼저 환현(桓玄)이란 친구가 말했다.

“창끝으로 쌀을 일어 칼로 불을 지펴 밥 짓기.”

은중감(殷仲堪)이란 친구가 뒤를 이었다.

“백 살 먹은 노인이 마른 나뭇가지 기어오르기.”

고개지가 입을 열었다.

“우물 위 두레박에 갓난아기 눕히기.”

이때 옆에서 불쑥 이런 소리가 날아들었다.

“장님이 한밤중에 외눈박이 말을 타고 깊은 못가를 지나가기(盲人騎瞎馬 夜半臨深池).”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구경하던 부하였다. 마침 은중감이 눈을 다쳐 안대를 착용했는데, 그것을 빗대어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다. 고관들의 자리에 무엄하게 끼어들었지만 말인즉슨 압권이었다. 모두가 박장대소하며 “과연 그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짓”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설신어>에 나오는 맹인할마(盲人瞎馬)라는 이야기다. 맹인이 외눈박이 말을 탄 것도 위험한데 그것도 모자라 캄캄한 밤에 깊은 물가를 지나간다. 상상만 해도 아찔한 광경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장면을 두고 위태로운 일이 아니라고 딴죽을 건 사람이 있다. 바로 연암 박지원이 그 발언의 주인공이다. <열하일기> 막북행정록에서 연암은 “그것은 위태롭기는 해도 위태로움을 제대로 안 것은 아니다”라고 딴소리를 한다. 연암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설명은 이렇다.

“장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멀쩡히 눈을 뜬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장님의 위태로운 상황을 보고 마음속으로 아찔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정작 장님은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를 못한다. 눈이 멀어 위태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데 무슨 위태로움을 느끼겠는가?”

본인은 위태로움을 모르는데 공연히 옆에서 진땀을 흘린다는 뜻이다. 연암은 보이지 않으면 위태로움도 없다고 말한다. 눈으로 보기에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위태로움이나 두려움은 밖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자기 스스로 빚어내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인생길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깊은 물가를 지나가는 것과 같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며, 어리석은 자에게 인생길은 길고도 멀다”는 말이 있다. 눈 어두운 하수에게 승부의 길은 더욱 길고도 험하다. 어디가 허방인지 모르는 위태로운 인생길을 고수들은 어떻게 헤쳐 나가는 것일까.

 

연암은 차라리 눈을 감으라고 주문한다. 눈이 탈이니 보지 말라는 것이다. 보면 헛생각이 일어 두려움이라는 허상을 빚어낸다. 보지 않으면 미혹에 빠지지도 않고, 실족하지도 않는다. 눈을 감으면 위태로움도 없다는 연암의 말은 궤변이 아니라 그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권고다. <열하일기>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다 연암은 이런 체험을 적어 놓았다.

 

청나라 황제가 피서산장에서 부르자 연암 일행은 황급히 달려간다. ‘일야구도하’ 즉 하룻밤에 황하를 아홉 번 건너게 된 사연이다. 그런데 컴컴한 밤길에 세찬 강물을 건너는 것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두려움을 연암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흘러나와 바위에 부딪치며 사납게 흘러간다.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결, 흐느끼는 여울은 굽이치고 뒤엎어지며 울부짖고 으르렁거리니 만리장성마저 무너뜨릴 듯하다. 만 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기병, 만 대의 대포와 만 개의 북으로도 그 물소리를 형용하기에 충분치 않다. 모래 위에 큰 바위가 덩그마니 서있고, 어두컴컴한 강둑에는 버드나무가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마치 물귀신들이 튀어나와 사람을 놀래는 것만 같다.”

 

이렇게 으스스한 밤에 위태로운 급류를 아홉 번이나 건넌 연암은 뜻밖에도 편안히 건널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원래 강물을 건너는 사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물살을 바라보면 어지러워져서 떠내려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보지 않으면 두렵지 않고, 탈도 안 난다. 이를 깨달은 연암은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그랬더니 물소리도 안 들리고 물귀신도 안 보였다. 연암은 아홉 번 강을 건너는데도 마치 가마에 앉아 있는 것처럼 평안했다고 적고 있다.

 

눈을 닫으면 두려움도 닫힌다. 연암은 눈이란 있는 대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본다고 말한다. 두려운 마음으로 보면 사방이 온통 두려운 것들뿐이다. 헛생각이 빚은 허상을 볼 뿐이니, 눈이란 도무지 믿을 게 못 된다. 연암은 눈과 귀에 얽매인 사람은 보고 들을수록 병이 된다고 말한다. 배중사영(杯中蛇影)의 고사에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친구 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술잔 속에 뭔가 이상한 것이 아른거렸다. “지렁이가 들어갔나?” 싶어서 보니 어이쿠, 그것은 뱀 그림자였다. 찜찜하기 그지없었지만 집주인이 무안해 할까봐 눈 딱 감고 들이켰다.

그런데 그날부터 배가 살살 뒤틀리며 아팠다.

“혹시 독사 새끼를 마신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속이 더욱 뒤집어졌다. 뱃속에서 뱀들이 새끼 쳐서 내장을 마구 갉아먹나 보다 싶었다. 마침내 그는 끙끙 앓아누웠다. 이 소식을 듣고 친구가 병문안을 갔다.

“이게 어찌된 변고인가?”

“저번에 자네 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나? 이제 실토하네만 그 때 술잔 속에 뱀이 들어있었는데, 그게 내 뱃속에 들어와 탈을 불렀다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돌아갔다. 얼마 뒤 친구가 아픈 그를 다시 자기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약술을 마시라며 또 뱀이 든 술잔을 내왔다. 기가 막혀서 친구를 바라보자 그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잔속에 또 뭐가 비치는가?”

“저번처럼 뱀이 들어있네.”

“고개를 들어 벽을 바라보게나.”

벽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뱀처럼 휜 활이 걸려있었다.

“아하! 그 뱀은 저 활이 술잔에 비친 거였구나!”

그 순간 뱃속에서 꿈틀거리던 뱀이 싹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아픈 것이 씻은 듯이 나았다.

 

술잔 속의 뱀 그림자는 마음이 빚어낸 것이었다. 뱀이라 생각하니 뱀이 되었고, 술이라고 생각하니 술이 되었다. 보이는 것에 미혹되면 이렇게 헛것에 물리게 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오색(五色)의 찬란한 빛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五音)의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한다”고 말한다. 다섯 가지 빛깔(청․황․적․백․흑)에 취하면 오히려 보지 못하고, 다섯 가지 음(궁‧상‧각‧치‧우)에 취하면 오히려 듣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성인은 배(본질)를 소중히 할뿐 눈은 중히 여기지 않는다”라고 이른다. 연암 박지원도 같은 뜻을 담아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화담(花潭) 서경덕이 외출을 했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젊은이를 만났다.

“어찌 하여 울고 있느냐?”

“예, 길을 잃어버려서입니다.”

“다 큰 어른이 길을 잃었다니?”

“예,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 스무 해 동안 장님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때는 제 온몸이 눈의 역할을 해 의심과 혼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집을 나와 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눈이 밝아지더니 사물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면 그건 기쁜 일이 아닌가?”

“아닙니다. 눈을 뜨니 갑자기 모든 게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집에 돌아가려는데 이 골목이 저 골목 같고, 이 집이 저 집 같아 도무지 길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울고 있는 것입니다.”

화담이 혀를 차며 말했다.

“도로 눈을 감아라!”

이에 그 젊은이는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보지 못할 때는 괜찮았는데 보게 되니 문제가 생겼다. 길이 너무 많으면 길을 잃는다. 눈으로 보이는 게 많으니까 세상이 헷갈리는 것이다. 차라리 예전처럼 눈을 감으면 헷갈리지 않을 수 있다.

 

보이고 들리는 게 많아 어지러운 세상이다. 어지러운 것을 바라보면 그 어지러움 속에 빠지게 된다. 두려움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더욱 커진다. 고수가 급류 속에도 담대한 것은 어지러운 물결을 보지 않고 고개 들어 강 건너 나아갈 방향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대는 무엇이 두려운가. 그 두려움은 혹시 두려워하는 그대의 마음이 빚어낸 허상은 아닌가. 내가 만들어낸 뱀에 내 마음을 물리지 말라. 보이는 게 너무 많아 헷갈린다면 차라리 다시 눈을 감아라.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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