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출호 지천하(不出戶 知天下)=성인은 집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 좌조에 이른 고수는 앉아 천리, 서서 만 리를 내다본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사람은 아직 하수다. 진정한 고수는 보이지 않아도 본다. 지혜라는 이름의 또 다른 눈을 통해서다.

 

위기구품의 여덟 번째 품계인 좌조(坐照)는 “가만히 앉아서도 천변만화를 훤히 내다본다”는 단계다. 프로기사 8단의 별칭인 좌조의 경지에 이르면 천문지리를 두루 꿰고 있기에 방안에 앉아서도 삼라만상의 변화를 훤히 꿰뚫는다. ‘좌시천리(坐視千里) 입시만리(立視萬里)’라는 표현처럼 말 그대로 앉아서 천 리, 서서 만 리를 내다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고사 하나를 사마천의 <사기> 신릉군(信陵君)열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날 신릉군이 위(魏)나라 왕과 바둑을 두고 있는데 북쪽에서 봉화가 올라왔다. “인접한 조(趙)나라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왔다”는 급보였다. 왕이 바둑판을 물리고 허겁지겁 대신들을 부르려고 하자 신릉군이 말렸다.

“별거 아닙니다. 조나라 군대는 쳐들어온 게 아니라 그쪽 왕이 사냥하는 것을 호위해 국경을 넘어온 것일 뿐입니다.”

위나라 왕이 불안해서 바둑을 두는 둥 마는 둥하고 있는데 북쪽에서 다시 봉화로 알려왔다. 조나라 왕이 사냥을 나왔으며, 군대 침공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위나라 왕이 깜짝 놀라 신릉군에게 물었다.

“아니,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족집게처럼 맞혔소?”

그러자 신릉군이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 집의 식객 중 하나가 조나라 왕의 근황을 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도 조나라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는 거지요.”

 

이처럼 방책을 쓰면 가만히 앉아서도 천리 밖을 내다볼 수 있다. 천리안은 마술사의 신통력이 아니다. 좌조에 이른 고수는 지혜라는 또 다른 눈을 이용해서 보지 않고도 먼 곳의 동정을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본다.

 

<회남자>에 “나뭇잎 하나가 지는 것을 보고 한 해가 저문 것을 알고, 병속의 얼음을 보고 세상이 추워졌음을 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좌조의 고수는 오동잎 하나가 지는 것을 보고서도 천하의 계절이 바뀌었음을 안다. 육안은 현상을 보지만, 심안(心眼)은 이치를 본다. 심안 곧 지혜의 눈을 갖춘 사람은 작은 낌새 하나를 통해서도 다가올 대변화를 읽어낸다.

 

<춘추>를 기록한 공자는 콩잎 하나에서 천하의 추세를 읽기도 했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춘추>를 보면 ‘겨울인 12월에 서리가 내렸는데도 콩잎이 시들지 않았다’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하찮은 일까지 기록했습니까?”

“그것은 시들어야 할 것이 시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으면 한겨울에 복숭아와 오얏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초목이 자연의 법도를 어긴다는 것은, 군주가 하늘의 법도를 어겼다는 징표가 아니겠습니까?”

당시 노나라는 숙손씨를 비롯한 대부들이 권력을 틀어쥐고 정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래서 초목과 금수가 하늘의 뜻에 감응해 이상 징후를 보이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겨울인데도 시들지 않은 콩잎은 천하의 도리가 어긋나고 있다는 징후라는 것이다.

 

중국 한나라의 명재상 병길(丙吉)의 고사에서도 좌조의 안목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날 병길이 수레를 타고 외출을 했는데 거리에서 사람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그 중에 어떤 이는 쓰러져 피를 흘리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병길은 나 몰라라 하고 그냥 지나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소달구지를 끌고 오는 농부와 마주쳤다. 소를 보니 혀를 늘어뜨리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러자 병길이 수레를 멈추게 하더니 시종을 시켜 농부에게 물었다.

“지금 이 소가 어디서 얼마나 멀리 걸어왔는가?”

농부가 대답했다.

“아직 여름 전인데 소가 땀만 흘리고 영 맥을 못 춥니다요.”

병길은 시종들에게 “어서 수레를 돌려 관청으로 돌아가자”라고 지시했다. 시종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병길에게 물었다.

“재상 어른, 물어야 할 것은 묻지 않으시고 묻지 않아도 될 것은 물으신 까닭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병길의 대답은 이랬다.

“백성이 서로 싸우는 것은 도성의 관리들이 단속할 일이네. 재상인 내가 시시콜콜 간섭할 사안이 아니지. 하지만 여름도 아닌데 소가 숨을 헐떡거리는 건 이제까지 없었던 이상기후의 조짐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장 올 여름 농사가 걱정이고, 큰 재해가 닥칠지도 모를 일이지. 재상인 나는 한시라도 빨리 대책을 세워야겠기에 어서 수레를 돌리라고 한 것일세.”

 

명재상 병길처럼 좌조의 고수는 사소한 것에서 거대한 변화를 읽고 미리 대비한다. 하수는 육안으로 나타난 결과를 보지만, 고수는 지혜의 눈으로 징조를 보는 까닭이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를 살펴 병세를 진단하는 것과도 같다. 고대중국의 전설적 명의인 편작(扁鵲)은 그의 저작으로 알려진 <난경(難經)>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보기만 하고도 병을 알아내는 것은 ‘신(神)’이고, 듣기만 하고서도 알아내는 것을 ‘성(聖)’이며, 묻고서 병을 알아내는 것을 ‘공(工)’이라고 하고, 환자를 만져보고서야 알아내는 것을 ‘교(巧)’라고 이른다.”

한마디로 척 보면 병을 아는 것이 최상이고, 물어보고서 아는 것은 중간이며, 만져보고 나서야 아는 것은 그 아래라는 뜻이다.

편작은 척 보기만 해도 몸속에 무슨 병이 있는지 알아맞히는 명의였다. <사기>의 편작열전을 보면 그는 방안에 앉아서도 담장 밖의 사물을 투시하는 신통력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 어느 도인이 전해준 신비한 환약 덕분인데, 전설이 가미된 그의 스토리를 잠시 따라가 보자.

 

편작은 젊은 시절 남의 객사에서 관리인으로 지냈는데, 그를 눈여겨 본 도인이 은밀히 불렀다.

“내가 비전(祕傳)의 의술을 알고 있는데, 그대에게 전해주려 하네. 절대로 남에게 발설하지 말게나.”

그러면서 도인은 품속에서 환약을 꺼내 편작에게 건넸다.

“깨끗한 풀잎에 맺힌 이슬에 이 약을 타서 마시게. 30일이 지나면 사물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될 걸세.”

편작이 약을 복용한 지 30일이 지나자 과연 눈이 밝아져 방안에 앉아서도 담장 밖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환자를 대하면 몸속 오장육부에 맺힌 작은 멍울까지 들여다보였다. 말하자면 편작은 앉아서도 천리 밖을 내다보는 좌조의 경지에 이른 셈이다. 이런 능력으로 의술을 행하자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명의로 소문이 나게 됐다.

 

그런데 편작의 투시력이 신비의 환약 효과 때문이 아니라 깊은 지혜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주는 일화가 전해진다. 편작은 탁월한 의술을 가졌지만 정작 자신의 아버지의 병은 고치지 못했다. 오랫동안 약을 지어 드려도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주위에서 까닭을 궁금해 했다.

한 번은 편작이 외지로 나가 오랜 시간 집을 비우게 되자 그의 제자에게 약을 지을 것을 부탁했다. 제자는 편작의 처방이 별효과가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약을 지었다. 편작의 아버지는 그 약을 먹고 얼마 안지나 병이 싹 나았다. 얼마 후 집에 돌아온 편작에게 제자가 으쓱거리는 마음으로 자신이 한 일을 얘기했더니 편작의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아, 큰일이구나. 아버지의 장례식을 준비할 날이 멀지 않았구나.”

제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병이 다 나으셨는데 장례식이라니?”

몇 개월 후 편작의 말대로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장례식을 치르게 됐다. 제자가 도대체 뭐가 잘못됐는지 스승에게 물었다. 편작의 설명은 이랬다.

“아버지는 몸이 건강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드신다네. 그 바람에 병에 걸리신 거지. 그래서 아버지의 병을 단번에 고치지 않고 조금씩 남겨 놓았다네. 그런데 자네가 지어준 약을 드시고 병이 다 나았으니, 옛 습관으로 돌아가 다시 몸을 망칠 것이고, 그러면 곧 돌아가실 것이라고 말했던 걸세.”

 

스승 편작과 그의 제자는 이렇게 보는 눈이 달랐다. 하수는 당장의 현실만 보지만, 고수는 그 다음에 벌어질 수순까지 내다본다. 편작과 제나라 환후(桓候)의 고사는 고수와 하수의 눈이 어떻게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제나라를 방문한 편작이 환후를 만나 그의 얼굴에 병의 기미가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임금에게는 병이 있습니다. 지금은 피부에 머물러 있으니 어서 손을 쓰십시오.”

그러나 환후는 “멀쩡한 내게 무슨 병이 있단 말이오”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 편작이 다시 환후를 만나서 말했다.

“임금의 병은 이제 살갗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서둘러 치료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환후는 언짢은 표정으로 편작의 말을 흘려들었다. 다시 열흘이 지난 뒤 편작이 말했다.

“임금의 병은 이제 위장까지 번졌습니다. 놔두면 위험합니다.”

환후는 더욱 불쾌해 하며 편작을 물리쳤다.

열흘 뒤에 다시 편작이 환후를 만났는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그냥 바라만 보다가 바로 물러났다. 이상하게 여긴 환후가 사람을 보내 까닭을 묻자 편작은 이렇게 대답했다.

“병이 피부에 있을 때는 바르는 약으로 고칠 수 있고, 살갗 속에 있을 때는 침이나 뜸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위장에 이르렀을 때는 탕약으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골수에 이르면 귀신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병은 이미 뼈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이젠 백약이 소용없지요.”

과연 그로부터 닷새가 지나자 환후는 온 몸의 뼈마디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제야 황급히 편작을 불렀으나, 그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환후는 결국 골수에 든 병으로 죽고 말았다.

 

편작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병을 보았지만, 환후는 제 몸의 병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편작은 작은 증세에서 큰 병의 징후를 읽었고, 환후는 큰 병이 나타날 때까지 작은 증세들을 깨닫지 못했다. 고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만, 하수는 뻔히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한다는 말 그대로였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성인은 문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알고(不出戶 知天下), 창밖을 엿보지 않고도 하늘의 운행을 본다(不闚牖 見天道)”라고 했다. 고수는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일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본다. 세상 이치를 두루 꿰었기에 가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본다. 좌조에 이른 고수는 나뭇잎 하나가 지는 것을 보고도 천하가 가을로 기울었음을 알고, 병속의 물이 얼면 한겨울 인내해야 할 때임을 안다.

 

보이는 것을 보는 사람은 아직 고수라 할 수 없다. 진정한 고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방에 앉아 담장 너머의 세상을 내다보는 것은 육안(肉眼)이 아니다. 지혜라는 이름의 또 다른 눈은 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대의 앞길을 훤히 비춰줄 것이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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