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유욕야 불능은기정(其有欲也 不能隱其情)=욕망을 품으면 본심을 숨길 수 없다. <귀곡자>에 나오는 말로서, 욕망을 건드리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나온다. 욕망이 그 사람의 급소다. 구체의 고수는 급소를 짚어 손가락 하나로도 너끈히 상대를 제압한다.

 

프로기사 7단의 별칭인 구체(具體)는 모든 것을 구비해서 바둑의 요체를 터득했다는 뜻이다. 구체에 이르면 기술적인 면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모든 수법을 마스터했기에 행마가 막힘이 없고 간명하다. 구체의 고수는 사안의 핵심을 꿰뚫어 정확히 급소를 찔러간다. 이는 마치 한의사가 침을 놓는 것과도 같다. 얽히고설킨 문제를 만나도 허둥거리지 않고 정확한 맥을 짚어 간결하고 명쾌하게 혈로를 뚫어 나간다.

 

앞서 얘기했듯이 구체에서부터는 조직을 지휘하는 경영자에 속한다. 조직원들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움직이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경영자는 상황에 매이지 않고 주도적으로 상황을 연출해 나간다. 즉 길이 없으면 길을 뚫고, 답이 없으면 문제를 고친다. 구체의 고수는 피동적으로 상황에 끌려가지 않고, 능동적으로 상황을 끌고 가는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 가운데는 구체라 이를 만한 고수가 제법 있다. 자신의 뜻대로 상황을 연출해 나가는 창조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도 그런 구체의 경지에 이른 고수로 꼽을 만하다.

 

공자의 제자는 3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에는 72현(賢)이 있고, 그 72현 중에는 10철(孔門十哲)이 있으며, 10철 중에는 안연, 자로, 자공 3인의 수제자가 있다. <논어>에는 공자와 이 세 제자의 대화가 가장 많이 나오는데, 통계에 의하면 자로가 모두 83회, 자공이 64회, 안연이 43회 등장한다고 한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자공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수치라고 하겠다. 공자는 자공을 가리켜 “언변이 뛰어나며 운명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재산을 크게 모았는데, 그가 예측하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고 평한 바 있다. 스승의 말처럼 자공은 뛰어난 말솜씨로 외교무대를 누빈 유세가였으며, 탁월한 이재솜씨로 거부를 일군 큰 상인이었다. <사기> 중니(仲尼)제자열전에서는 자공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자공은 장사해서 이익을 챙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때에 맞춰 물건을 매점매석해서 재산을 늘렸다. 그는 남의 장점을 드러내주는 것을 좋아했으나, 남의 잘못을 감춰 주지는 않았다. 일찍이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에는 수천 금을 쌓아두고 살았다.”

자공은 수천 금을 쌓아놓은 재력가이자 재상을 지내기도 한 정치가였다. 공자의 수제자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자공은 부자들의 기록인 <사기> 화식(貨殖)열전에도 등장한다. 화식열전에서는 자공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공은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비단 등의 선물을 가지고 제후들과 교제했다. 자공이 방문하는 곳마다 제후들은 직접 뜰에 내려와 서서 대등한 예우로써 맞이했다.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두루 알려지게 된 것도 자공이 그를 모시고 따라다니며 도왔기 때문이다. 세력을 얻으면 세상에서 더욱 두드러진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부호인 자공은 요즘으로 치면 최고급 리무진에 해당하는 사두마차를 타고 다니며 어딜 가든 제후와 맞먹는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수 있었던 것은 자공이 재력으로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자공의 호사스런 나들이 모습은 뭇사람의 눈에 거슬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논어> 안연편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어떤 이가 자공에게 말했다.

“군자가 바탕만 갖추면 그만이지 겉모습은 뭣 하러 꾸미는 거요?”

자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안타깝소. 당신의 혀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보다도 빠르구려. 꾸미는 것도 바탕만큼 중요하고, 바탕도 꾸미는 것만큼 중요한 법이오. 호랑이나 표범 가죽에 털이 없다면 개나 양의 가죽과 뭐가 다르겠소?”

 

자공의 부에 대한 생각은 여느 도학자처럼 고지식하지가 않았다.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누리고 살 수 있으면 누리는 것이 미덕이라는 것이다. 자공은 꾸밀 수 있는데도 굳이 안 꾸미고 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호랑이 가죽과 개 가죽은 엄연히 다르며, 호랑이 가죽을 외면한다고 더 청렴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이런 현실적인 물질관이 공자의 천하 주유를 가능하게 했으니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는 셈이다.

막대한 부를 일군 경영자로서 자공의 수완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외교가로서의 탁월한 형세판단과 화려한 언변으로 미루어 구체의 경지에 이른 그의 경영 솜씨를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자공은 스승 공자가 가장 아꼈던 안연은 문일지십(聞一知十)이요, 자신은 문일지이(聞一知二)라고 낮춰서 말한 적이 있다. 겸손의 말이지만 하나를 들어 둘을 아는 것도 보통사람의 총명을 뛰어넘는 것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은 외교무대에서의 자공의 활약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자공이 한번 나섬으로써 노나라를 존속시키고,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오나라가 망하게 하고, 진나라가 강국이 되게 하고, 월나라를 패자(覇者)로 만들었다. 자공이 천하를 한번 돌자 국제 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큰 변동이 생겨난 것이다.”

 

자공이 유세객으로서 한번 뜨니 다섯 나라에서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상대의 속을 꿰뚫어서 천변만화를 빚어내는 고수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가히 구체의 경지라고 할 만한 자공의 절묘한 행마를 잠시 감상해 보자.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제나라의 실권자 전상(田常)이 나라를 삼키려는 역심을 품고 다른 권세가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을 꾸민 것이다. 눈엣가시인 대신들의 세력을 전쟁터로 내몰면 힘이 약화돼 전상의 입지는 저절로 강화되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런데 제나라가 치려는 노나라는 공자의 고향이었다.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우려하여 제자들에게 말했다.

“노나라는 우리 조상의 묘소가 있는 부모의 나라다. 지금 나라가 위태로운데 자식으로서 어찌 보고만 있겠느냐?”

제자들이 서로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공자는 모두 만류하고 자공을 택하여 보냈다.

자공의 첫 행마는 제나라였다. 자공은 문제의 핵심인 전상을 만나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상공께서 노나라를 치려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노나라는 정벌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성곽은 낮고 볼품없으며, 군주는 어리석고 어질지 못하며, 신하들은 거짓된 자들뿐이고, 병사들은 전쟁을 꺼립니다. 그러니 싸울 만한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전상의 의표를 찌르는 말이었다. 노나라는 형편없는 상대인데,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싸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상은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하며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공께서는 차라리 오나라를 치십시오. 오나라는 성이 높고 두꺼우며, 무기는 튼튼하고 새것이며, 병사들은 정예병이고 군량도 넉넉하며, 훌륭한 장수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야말로 쉽게 정벌할 수 있습니다.”

역시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오나라는 군사력이 강하니, 그렇기 때문에 쉽게 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상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벌컥 냈다.

“선생은 어찌 거꾸로 말하시오. 쉬운 것을 어렵다 하고, 어려운 것을 쉽다고 하니 말이 되오?”

자공이 침착한 어조로 설명을 해나갔다.

“제가 듣건대 걱정이 안에 있으면 강한 나라를 치고, 걱정이 밖에 있으면 약한 나라를 친다고 했습니다. 지금 상공의 걱정거리는 안에 있습니다. 상공을 견제하는 대신들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허약한 노나라를 치면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이길 게 빤하니 그 공을 업고 대신들의 세력이 더욱 커지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강한 오나라를 치면 싸우다 지쳐서 그들은 힘이 다 빠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나라는 저절로 상공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어느 쪽이 득일지는 따져볼 것도 없지 않습니까?”

전상의 속셈을 정확히 짚은 설명이었다. 전상은 솔깃하여 자공에게 물었다.

“그럼 어찌 하면 좋겠소. 이미 군대를 노나라 쪽으로 보냈는데, 이제 와서 오나라로 돌린다면 대신들이 나를 의심하지 않겠소?”

전상의 마음이 넘어온 것을 확인한 자공은 빗장을 걸어 잠갔다.

“오나라가 먼저 제나라를 공격해 오면 그때 자연스레 군대를 돌리면 됩니다. 제가 오나라로 가서 노나라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려운 데를 알아서 긁어주는 자공의 말에 전상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자공은 오나라로 가서 왕인 부차(夫差)에게 제나라를 치도록 설득했다. 오왕 부차는 패자(覇者)가 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지만 월왕 구천(句踐)이 신경 쓰여 쉽게 군대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공은 그런 부차의 속마음을 건드렸다. 즉 부차가 천하의 패자가 되려면 제나라를 쳐서 약한 노나라를 구원해 이름을 높이라고 부축인 것이다. 그리고 부차의 걱정거리인 월왕 구천도 알아서 해결해 주겠다고 구슬렀다. 월나라가 도발은커녕 되레 오나라에 지원병을 보내도록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걱정거리를 덜어주는 자공의 말에 부차 역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전상에 이어 부차를 구워삶은 자공은 다시 월나라로 갔다. 그리고 오나라에 복수를 꿈꾸고 있는 월왕 구천에게 “속셈을 들키지 말라”며 이번에도 단도직입으로 급소를 찔렀다. 오나라에 감쪽같이 복수하려면 되레 지원병을 보내 상대를 속여야 한다고 자공이 설득하자 구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자공은 진나라로 가서 오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대비하라고 충고했다. 오나라가 제나라를 이기면 다음 타깃은 진나라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수순이었다. 진나라도 자공의 말을 듣고 전쟁 준비를 단단히 했다.

 

자공이 다섯 나라에 이르는 유세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가자, 과연 제나라가 노나라로 향하던 군사를 돌려 오나라를 쳤다. 오나라는 월나라의 방조 아래 제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내친 김에 진나라로 진격했다. 대비하고 기다렸던 진나라는 오나라의 공격을 물리쳤고, 이때를 노려 월왕 구천은 쇠약해진 오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마침내 패자(覇者)가 되었다.

자공은 노나라를 구하기 위해 마치 도미노를 쌓듯이 네 나라를 엮어 놓았다. 그리고 맨 앞의 패를 건드리자 나머지 패들이 줄줄이 넘어졌다. 모두가 자공이 내다본 그림 그대로였음은 물론이다. 자공의 절묘한 수완은 가히 구체라 이를 만하다.

 

구체의 고수가 한번 수를 내면 온 판이 출렁거린다. 전체의 형세를 읽어 정확하게 맥을 짚어가기 때문이다. 자공이 그러했듯이 상대를 이쪽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면 속마음을 읽어서 그 급소를 찔러야 한다.

“사실은 숨길 수 있어도 욕심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욕망이 있는 곳이 그를 제압하는 급소다. 가슴속에 감춰둔 욕망을 건드리면 웬만한 상대는 저절로 끌려오게 돼 있다.

 

자공의 성공담이 부러운가. 상대의 욕망을 찔러라. 급소를 알면 손가락만으로도 너끈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욕망이 있는 곳에 급소가 있다. 욕망 없는 사람이 없듯이, 급소 없는 사람은 없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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