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채매의(討債買義)=빚을 탕감하여 의를 얻으라. 현명한 사람은 채무문서를 불살라 마음을 사들인다. 마음을 얻는 것은 든든한 집을 얻는 것과 같다. 사람들의 마음에다 집을 지어라. 하수는 보이는 집을 짓지만, 고수는 보이지 않는 집을 짓는다.

 

“복싱은 이상한 스포츠지. 모든 게 거꾸로야. 왼쪽으로 가려고 할 땐 왼발이 아닌 오른 발가락을 움직여. 오른쪽으로 갈 땐 왼 발가락을 움직이지. 고통이 와도 피하기는커녕 그 속으로 뛰어드니까. 복싱의 마법은 모든 게 거꾸로라는 거지.”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겸 주연을 <밀리언달러 베이비>(2004년 작)에 나오는 대사다. 모든 게 거꾸로인 것은 복싱뿐만이 아니다. 인생에서도 성공에 이르는 길은 거꾸로 나있다. 통유(通幽)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그 길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수들은 남들이 보기에 상식을 거슬러 엉뚱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바둑의 집짓기도 마찬가지다. 바둑은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큰 집을 지어놓은 사람은 승리를 손에 쥔 것 마냥 뿌듯해 한다. 그러나 선작오십가필패(先作五十家必敗)라는 바둑격언이 있다. 초반에 큰 집을 지은 사람은 오히려 반드시 지게 돼 있다는 것이다. 유리하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뜻이지만, 좀 더 깊은 뜻도 담겨 있다. 즉 하수들은 눈에 보이는 집을 짓지만, 고수들은 보이지 않는 집을 짓는다. 하수들이 짓는 집은 크고 작은지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고수들의 집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초반에 보면 고수들은 한가하게 딴청을 부리며 손해 보는 길로 가는 듯하다. 하지만 중후반으로 들어서면 숨겨놓은 집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대세를 결정짓는다. 복싱이든 바둑이든 본능을 누르고 거꾸로 움직여야 이길 수 있는 게 승부 세계의 오묘한 이치이다.

 

무작정 큰 집을 짓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는 진시황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폭군으로 소문난 진시황은 역사상 가장 큰 집을 짓고 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이 말년에 건립하기 시작한 아방궁은 동서 길이가 약 700ⅿ, 남북이 약 120ⅿ에 이르는 2층 건물로 정전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을 포함한 진시황의 궁궐은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 진나라가 멸망하면서 항우의 군사에 의해 불탈 때 그 불길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곧 잿더미로 변할 집을 지으려고 대규모 공역(工役)을 일으킨 진시황의 처사는 허망하기 짝이 없다.

반면에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작은 집 일화는 이와 대조를 이룬다. 현인으로 소문난 소크라테스의 주변은 철학을 배우러온 젊은이들로 늘 붐볐다. 그래서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집을 지었는데 척 보기에도 너무 작았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었다.

“아니, 선생님처럼 큰 이름을 가지신 분이 이렇게 작은 집을 짓다니요?”

소크라테스가 태연히 대답했다.

“내 눈에는 이 집이 결코 작지 않네. 집이 작아도 생각이 큰 사람들로 채운다면 그건 큰 집이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조선 전기의 현신(賢臣) 허백당 홍귀달(洪貴達)의 일화가 그 중 하나다.

연산군 시절의 일이다. 한양 남산에 가면 9만9천9백99간 짜리 대저택이 있다고 조선 팔도에 소문이 쫙 났다. 그래서 시골사람들이 한양에 오면 그 집을 구경하려고 남산자락을 훑고 다녔다. 그러나 묻고 물어 찾아간 그 대저택은 실망스럽게도 허백당이라는 당호가 붙은 단간 초막이었다. 사람들은 그 초라한 오두막이 어째서 9만9천9백99간의 어마어마한 집으로 소문이 났는지 의아해 했다. 집주인 홍귀달의 설명은 이랬다.

“몸 하나 담을 단간 집에서도 9만9천9백99간의 큰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만하면 한양에서 제일 큰 집이 아니겠는가?”

한성판윤과 판서 등의 벼슬을 지낸 홍귀달이지만 집은 한 간 초막으로 만족했다. 홍귀달의 관심도 집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의 크기에 있었다.

 

고수들이 집을 재는 잣대는 보통사람들과 같지 않다. 겉보기에는 작아도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크면 큰 집으로 여긴다. 고수들이 짓는 집 가운데는 보이지는 않아도 세상의 어떤 궁궐보다 큰 집도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 송청(宋淸)이라는 의원이 있었는데, 약재를 사들일 때 남보다 후한 값을 줘서 약재상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 결과 그는 남보다 좋은 약재를 공급받았고, 자연히 그의 약은 효험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소문을 듣고 환자가 찾아오면 송청은 신분의 귀천이나 재산의 빈부를 따지지 않고 성의를 다해 진료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으며, 외상으로 약을 지어주는 일도 허다했다. 외상 장부가 산더미처럼 쌓여도 그는 한 번도 약값을 독촉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라 해마다 연말이면 그동안의 외상장부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사람들이 손해 보는 일이 아니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40년 동안 외상장부를 수없이 태웠지만 손해를 보지는 않았소. 약값을 떼먹히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 늦게 받는 것일 뿐이오. 약값을 못 갚은 사람 중에는 나중에 찾아와 약값보다 훨씬 큰 보답을 한 이들이 많았소. 또 그 후손들까지도 나를 은인으로 여기고 있소. 은혜란 내 당대로 끝나지 않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기름진 밭이라오. 약값 몇 푼으로 그 귀한 양전(良田)을 얻을 수 있으니 어찌 남는 장사가 아니겠소.”

 

송청은 보이는 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집을 지었다. 땅이 아니라 마음 밭에다가 무너지지도 불에 타지도 않는 집을 지은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아방궁을 크다고 하지 않고, 단칸방을 작다고 하지 않는다. 보이는 집보다 보이지 않는 집이 더 큰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송청처럼 외상장부를 불태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들인다.

 

삼천 식객을 거느린 것으로 유명한 제나라의 맹상군에게도 빚 증서를 불태워 버리고 민심을 얻은 일화가 있다. 이른바 ‘토채매의(討債買義)’라는 고사가 그것이다. 맹상군은 문객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대우했다. 재주가 뛰어난 문객은 가장 좋은 숙소인 대사(代舍)에 머물게 했고, 그 다음 문객은 행사(幸舍)를 내주었다. 별다른 재주가 없는 사람은 전사(傳舍)에 묵게 했다. 대사의 상등 문객에게는 고기반찬을 대접하고 외출할 때는 수레도 내주었다. 행사의 중등 문객에게는 고기반찬만 주고 수레는 내주지 않았다. 전사의 하등 문객에게는 그저 식사만 제공했다.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의 풍환(馮驩)이라는 사나이가 맹상군을 찾아왔다. 맹상군은 별다른 재주가 없다는 풍환의 말을 듣고 전사를 내주었다. 며칠 뒤 객사 관리인에게 풍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 보았다.

“새로 온 손님은 날마다 칼을 두드리며 ‘장검(長劍)아, 돌아가자. 밥상에 고기반찬이 없구나’ 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이 말을 들은 맹상군은 풍환을 행사로 옮겨 주었다. 며칠 뒤 맹상군이 다시 풍환의 동정을 물어 보았다.

“그 손님은 ‘장검아, 돌아가자. 외출을 하려 해도 수레가 없구나’ 하고 노래합니다.”

맹상군은 풍환을 대사로 모시게 했다. 다시 며칠 뒤 동정을 물으니 객사 관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손님은 여전히 칼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릅니다. ‘장검아, 돌아가자. 집안을 돌볼 수가 없구나’라고요.”

맹상군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풍환의 집으로 양식을 보내주었다.

 

이처럼 많은 문객들을 거느린 까닭에 맹상군은 돈이 늘 부족했다. 궁여지책으로 맹상군은 자신의 식읍인 설(薛) 땅의 백성들에게 곡식을 꿔 주고 이자를 받았다. 그런데 이자가 제때 들어오지 않아 몹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됐다. 맹상군은 설 땅으로 사람을 보내 이자를 받아오기로 마음 먹었다. 문객 중에서 보낼 사람을 물색하는데 풍환이 자원하여 나섰다. 설 땅으로 떠나는 풍환이 맹상군에게 물었다.

“이자를 받은 후에 무얼 사가지고 오면 되겠습니까?”

“알아서 하시오. 내 집에 모자라는 것이면 좋겠소.”

설 땅에 도착한 풍환은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차려놓고 백성들을 불렀다.

“곡식을 꿔간 사람들은 모두 모이시오. 이자를 낼 사람은 물론이고 이자를 낼 수 없는 사람도 빚 문서를 갖고 오시오.”

사람들이 모이자 풍환은 한 사람 한 사람씩 빚 문서를 살피고 사는 형편을 물었다. 그리고 빚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은 변제 날짜를 약정하고, 이자조차 물기 어려운 사람은 그 자리에서 빚 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이를 본 백성들이 깜짝 놀라자 풍환이 말했다.

“맹상군이 곡식을 빌려 준 것은 곤궁한 백성들을 돌보기 위함이지, 이자 돈을 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소. 맹상군은 많은 문객을 거느려 봉록만으로는 부족하오. 그래서 부득불 나를 보내어 이자를 받아오게 했소. 그런데 여러분의 처지가 여의치 않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소. 그러니 빚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은 갚고, 갚을 수 없는 사람은 안 갚아도 좋소. 하지만 맹상군의 은덕만은 잊지 마시오.”

감격한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객사로 돌아온 풍환에게 맹상군이 노하여 물었다.

“아니, 이자를 받아가지고 온다더니 어째서 그냥 돌아왔소?”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자보다 더 큰 것을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이자보다 더 큰 것이라니? 그게 뭐요?”

“백성들의 마음이지요. 그것은 바로 주군의 집에서 가장 모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는 맹상군에게 풍환이 자세히 설명했다.

“여유 있는 사람은 약속한 기한에 맞춰 이자를 낼 것입니다. 그러나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10년을 기다려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빚 문서는 쓸데없는 휴지 쪽이나 다름없습니다. 못 갚을 사람에게 자꾸 독촉하면 빚 문서를 찢어버리고 도망갈 것입니다. 어차피 찢어질 거라면 차라리 불살라 인심이라도 얻는 것이 낫습니다. 주군의 봉읍인 설 땅은 발붙일 근거지 아닙니까. 그 백성들이 주군의 은덕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주군을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그들의 마음은 천군만마보다도 든든한 후원군이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맹상군의 낯빛이 풀렸다. 맹상군은 풍환이 보기보다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더 각별히 대우했다. 설 땅 백성의 마음을 사둔 풍환의 선견지명은 곧 현실에서 빛을 발했다.

 

얼마 뒤 맹상군이 시기하는 자들의 비방을 받고 재상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러자 삼천 문객들은 썰물처럼 떠나갔고, 풍환을 비롯한 몇 사람만 달랑 남았다. 사람들로 늘 북적이던 집은 하루아침에 적막강산으로 변하고 말았다. 실의에 빠진 맹상군은 외롭게 행장을 꾸려 봉지인 설 땅으로 떠났다.

그런데 설 땅으로 들어서자 맹상군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이 벌어졌다. 설 땅의 백성들은 맹상군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앞 다퉈 마중을 나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두 손 들어 반기고, 어떤 이들은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뜻밖의 환대에 맹상군이 감격해서 옆에 있던 풍환에게 말했다.

“일전에 풍 선생이 이자 대신 백성의 마음을 받아왔다고 했을 때 솔직히 속으로는 못마땅했었소.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깊은 뜻을 알게 됐구려.”

 

풍환이 가져다 준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뒤 풍환은 유세에 나서 맹상군을 내친 제나라 왕을 만나 설득했다. 그리하여 맹상군을 원래의 재상 자리로 복직시킨 것은 물론 추가로 더 넓은 식읍도 받게 했다. 허름한 차림으로 찾아온 풍환이 “장검아, 돌아가자” 하고 노래할 때 꾹 참고 상객 대우해 준 것이 헤아릴 수 없는 보답으로 돌아온 것이다.

 

삼천 식객이 머물던 맹상군의 저택도 권력이 떠나면 하루아침에 초막처럼 적막하게 변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백성의 마음에 지은 집은 어떤 풍파에도 변함이 없다. 풍환은 식객이 떠난 것을 상심하는 맹상군에게 “부귀하면 찾아오는 사람이 많고, 가난하면 친구도 떠난다(富貴多士 貧賤寡友)”며 위로했다. 세상의 집이란 빈부귀천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법이다. 그래서 고수는 눈에 보이는 집보다 보이지 않는 집을 더 귀히 여긴다.

 

마음을 얻는 자가 세상을 얻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아방궁 같은 집을 지었다고 부러워 할 일은 아니다. 진짜 큰 집은 따로 있다. 인생의 크기는 보이는 것들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대 마음의 크기가 곧 그대 인생의 크기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