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방불입 난방불거(危邦不入 亂邦不居)= 위험한 곳에는 발도 들이지 말고, 어지러운 곳에는 누울 생각을 말아야 한다. 도처가 지뢰밭인 세상살이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또 두드려야 한다. 지혜는 위험을 위험으로 아는 데서 출발한다.

 

“예술가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을 사용하고, 정치가는 거짓을 말하기 위해 진실을 사용한다.”

파블로 피카소의 말이다. 예술가는 거짓을 들어 진실을 보여주고, 정치가는 진실을 앞세워 거짓을 감춘다. 현실은 진실과 거짓이 마구 섞여 있다. 외양만 봐서는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훗날 보니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거짓이고, 거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진실인 경우가 허다하다. 정치가들은 이를 이용해 암암리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를 보여주는 <한비자> 세난(說難)편의 고사다.

 

춘추시대 정(鄭)나라 군주 무공(武公)은 호(胡)나라를 치고 싶었지만 군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먼저 자기 딸을 호나라 왕의 아내로 시집을 보냈다. 상대의 경계심을 늦추고자 정략결혼을 시킨 것이다. 그런 다음에도 무공은 또 하나의 계교를 꾸몄다. 무공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짐짓 물었다.

“내가 출병을 하려고 하는데 어느 나라를 먼저 정벌하면 좋겠소?”

대장군인 관기사(關其思)가 대뜸 대답했다.

“호나라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군의 속셈이 무엇인지 꿰뚫고 있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무공은 화를 벌컥 냈다.

“호나라는 우리와 형제 나라다. 왕이 나의 사위 아닌가? 그런 나라를 정벌하라니 이 무슨 말인가?”

정무공은 그 자리에서 관기사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호나라 왕은 감격했다. 그는 정나라가 자기 나라와 친밀하다고 생각해서 아무런 방비도 취하지 않았다. 얼마 뒤 정나라는 호나라를 기습 공격해 나라를 빼앗아 버렸다.

 

딸을 주고 충신마저 베어버린 정무공의 모습이 연출된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을 내세워 거짓을 말하는 정치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순진한 호나라 왕은 상대를 잘못 믿었다가 덫에 걸리고 말았다. <손자병법>은 “전쟁은 속임수(兵者詭道也)”라고 일깨운다. 속고 속이는 전쟁에서는 늘 참과 거짓이 뒤섞여 있어 이를 구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아차” 하면 뒤늦은 후회이기가 십상이다.

 

문제는 거짓은 항상 진실보다도 더 진실해 보인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속임수는 멀쩡한 모습으로 다가와 의표를 찌른다. 가령 지뢰나 부비트랩 같은 덫은 아무렇게나 설치하지 않는 법이다.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곳에 감쪽같은 눈속임으로 숨겨놓아 적에게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힌다. 마찬가지로 함정이 널려있고, 음모와 술수가 판을 치는 전쟁터에서는 겉보기에 가장 그럴 듯한 것이 가장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야백(夜白)은 부답(不踏)이고, 공방(空房)은 불입(不入)이며, 이성(異聲)이면 불행(不行)하고, 이취(異臭)면 불보(不步)하라는 말이 있다. 밤에 하얗게 보이는 것은 물웅덩이이기가 십상이고, 빈 방에는 뭔가 감춰져 있을 수 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가던 길을 멈춰야 하며, 이상한 냄새가 나면 더 이상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 상대가 쳐놓은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예전에 이창호 9단은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건너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좋은 수가 보여도 몇 번을 확인한 뒤 짐짓 모른 체하며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신중함이 있었기에 이 9단은 한 시대를 풍미한 바둑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다.

고수는 이창호 9단이 그랬듯이 때로는 돌다리가 있어도 못 본 체하고 돌아간다. 하수는 일단 건너고 보지만, 고수는 일단 피하고 본다. 멋모르는 하수는 겁이 없지만 산전수전 겪은 고수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공자는 <논어> 태백편에서 ‘위방불입(危邦不入) 난방불거(亂邦不居)’ 하라고 일렀다. 도처가 지뢰밭인 세상에서는 위험한 곳에는 발도 들이지 말고, 어지러운 곳엔 거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공자 같은 성인도 살얼음판을 걷듯, 깊은 강을 건너듯 조심조심 난세를 헤쳐 나갔다. 위험을 위험으로 깨닫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고수가 되는 첫걸음이다.

 

프로기사 5단의 별칭인 ‘용지(用智)’는 “지혜를 사용할 줄 안다”는 뜻으로, 그 지혜는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두려움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용지’의 고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험을 피하는지, <한비자> 설림(說林)편의 예화를 살펴보자

 

칼 감정을 잘하는 사람 중에 증종자(曾從子)라는 이가 있었다. 위(衛)라 왕이 오나라 왕을 미워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증종자가 위나라 왕을 찾아가 말했다.

“왕을 위하여 오나라 왕을 처치할 방책이 있습니다. 오나라 왕은 보검을 좋아합니다. 신은 칼 감정을 잘하는 사람이니 오나라 왕에게 명검을 감정해 준다며 접근하겠습니다. 그러다가 기회가 되면 칼을 뽑아 그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그러나 위나라 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유는 이렇다.

“그대가 그런 일을 하겠다는 것은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오나라는 강하고 부유하며, 위나라는 약하고 가난하다. 그러니 그대는 이익을 좇아 반드시 오나라로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오나라 왕을 위하여 같은 방법으로 나를 해칠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그러고는 위나라 왕은 증종자를 내쫓아 버렸다.

칼은 양날을 갖고 있다. 상대국 왕을 찌르겠다는 사람은 여차하면 이쪽 왕을 찌를 수도 있다. 신의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는 마냥 신뢰하면 안 된다. 이익을 좇는 사람은 이해득실이 바뀌면 언제든지 표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지’에 이른 고수는 상대를 벤 칼은 나를 벨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무리 상대가 그럴듯한 말로 접근해 와도 조심 또 조심한다. <한비자> 설림편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노단(魯丹)이라는 사람이 중산(中山)의 왕을 만나 세 차례나 유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뇌물로 금 오십 근을 왕의 측근 신하들에게 뿌리고 천거를 부탁했다. 그 뒤에 왕을 만났는데 노단이 아직 말도 꺼내기 전에 녹을 내리고 술과 음식을 베풀며 후하게 대접했다. 뇌물의 약발이 통한 까닭이다. 노단은 궁궐을 나오자마자 숙소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중산을 떠났다. 그의 수레를 모는 시종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중산 왕이 이제야 비로소 우리를 제대로 대해 주었는데 어째서 이곳을 떠나십니까?”

노단이 씁쓸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중산의 왕은 나의 능력을 본 것이 아니라 남의 말을 듣고서 나를 잘 대접한 것이다. 그렇다면 남의 말을 듣고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처벌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런 나라에서 더 머뭇거리는 것은 위험하다.”

과연 말 그대로였다. 길을 떠난 노단이 미처 국경을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어떤 공자가 왕에게 그를 헐뜯었다.

“노단은 틀림없이 조(趙)나라의 첩자로 우리를 염탐하러 왔을 것입니다. 어서 쫓아가 그를 잡아들이십시오.”

중산의 왕은 그 말을 듣고 노단을 붙잡아 오게 하여 처벌했다.

 

사람의 귀는 양쪽에 달려 있다. 내 말을 잘 듣는 사람은 남의 말도 잘 듣는다. 귀가 얇은 군주가 내 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면 다른 쪽의 말에도 솔깃해 할 수 있다. 측근 신하들도 마찬가지다. 측근을 통해 득을 봤다면, 그로 인해 화를 입을 수도 있다. 한 입으로 두 말 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용지’의 고수는 두려움이 많다. 긍정적으로 보이는 앞면 뒤에는 부정적인 면도 감춰져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를 깨달은 노단은 ‘용지’의 고수라 할 만 하지만 때가 늦었다. 뇌물을 뿌리기 전에 깨달았다면 재물도 손해 보지 않고 화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세상에서는 한쪽 면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비자>에는 이런 재미있는 비유가 나온다. 미친 사람이 동쪽으로 달리면 뒤쫓는 사람도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 두 사람 모두 동쪽으로 달리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그래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도 속단하지 말고 그 속셈을 잘 살펴야 한다. 오만한 사람은 겁을 몰라 오판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두려움을 알아 신중히 처신한다. 마지막으로 <한비자> 설림편에 나오는 ‘용지’의 고수를 한 사람 더 살펴보고 글을 맺기로 하자.

진(晋)나라의 중항문자(中行文子)라는 사람이 죄를 짓고 달아나다가 어느 마을을 지나게 됐다. 시종이 말했다.

“이 마을의 관리는 공께서 지난날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람입니다. 들러서 잠시 쉬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문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가 일찍이 음악을 즐겼을 때 그는 나에게 비파를 보내준 일이 있다. 또 내가 패물을 좋아한다고 하니 옥반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굽실거리며 내 비위를 맞춰 나에게 등용되려고 했던 자다. 그로 미뤄보면 이번에는 그가 나를 잡아들임으로써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춰 그쪽에 등용되려고 할 것이다. 두려우니 어서 떠나자.”

과연 그 마을의 관리는 예상했던 대로 문자를 잡으려고 뒤쫓아 나왔다. 그리고 뒤에 처져 있던 짐수레 두 대를 붙잡아서 자신의 군주에게 바쳤다.

나에게 굽실거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적에게도 얼마든지 굽실거릴 수 있다. 앞모습이 똑같다고 뒤까지 그럴 줄로 아는 것은 순진한 오산이다. 진실과 거짓, 매혹과 미혹이 혼재돼 있는 세상에서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위험을 위험인 줄로 깨닫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지혜로운 자는 ‘이성(異聲)’이면 길을 멈추고, 이취(異臭)면 접근을 삼간다. ‘용지’의 고수는 야백(夜白)이면 밟지를 않고, 공방(空房)이어도 냉큼 들어서지 않는다. 밤길을 마구 내닫는 사람은 고수가 아니다. 두려워 설설 기어가는 사람이 고수다. 삼가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승리에 이를 수 있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