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위직(以迂爲直)=돌아가는 것이 지름길이다. 직선으로 간다고 반드시 먼저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곡선은 직선보다 빠르다. 고수는 우회로를 지름길로 삼는다. 고수가 되려면 직선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야구투수에는 강속구 위주의 정통파와 변화구 위주의 기교파가 있다. 직구만 던져서는 아무리 공이 빨라도 타자에게 얻어맞기 십상이다. 커브를 섞어 던져야 강타자라도 뜻대로 제압할 수 있다. 위기구품의 ‘소교(小巧)’가 이를테면 변화구에 눈을 뜬 기교파 투수에 해당한다.

 

프로기사 4단의 별칭인 ‘소교’는 “서투르나마 기교를 부릴 줄 안다”는 뜻이다. 소교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직구를 기다리는 타자에게 커브를 던져 헛스윙을 유도할 줄 안다. 즉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기교를 사용할 줄 아는 단계다. 장인(匠人)의 경우 기교는 직선을 구부려 교묘하게 장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소교’의 고수에 이르는 길도 직선적 대응을 자제하고 곡선적 수법을 구사할 줄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하수의 행보는 직선적이지만 고수는 곡선적이다. 힘만 믿고 의지하는 하수는 이것저것 안 재고 일직선으로 달려들지만, 생각이 깊은 고수는 짐짓 딴청을 부리며 상대의 의표를 찌른다. 이는 마치 권총과 대포의 차이와도 같다. 권총의 탄도는 직선이지만 대포의 탄도는 곡선이다. 가까운 것을 맞히는 총알은 직선으로 날아가지만 먼 곳의 표적을 겨냥한 대포알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권총과 대포는 파괴력이 다르듯이 조준방향도 다르다.

활을 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직선으로 쏜 화살은 얼마 못가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45도 상공을 향하여 쏜 화살이라야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간다. 그러기에 고수의 활일수록 먼 허공을 겨냥한다. 노리는 목표가 눈앞이 아니라 멀리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 군쟁(軍爭)편은 “돌아가는 것이 지름길이고(以迂爲直), 불리한 조건이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以患爲利)”고 이른다. 직통 길을 놔두고 빙 돌아가는 ‘우직지계(迂直之計)’가 승리의 지름길이자 고수의 수법이라는 것이다. 고수는 직선으로 가는 길보다 우회로를 지름길로 삼는다.

 

‘우직지계’는 하수가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인다. 가까운 길을 놔두고 굳이 먼 길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현(大賢)은 약우(若愚)요, 대직(大直)은 약굴(若屈)이라고 했다. 큰 지혜는 어리석어 보이고,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처럼 보이는 법이다. 고수의 행보는 때로 허공을 겨누는 듯이 엉뚱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크고 높은 것을 목표로 하는 지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바둑도 그렇지만 인생도 마찬가지로 젊었을 때에는 대개 직선적이어서 힘만 의존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시야가 넓어지고 가까운 길도 돌아가는 지혜를 사용할 줄 알게 된다. 전설이나 무협지에 등장하는 도인이 백발노인인 것은 늙은이의 주름은 지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 들어 원숙해질수록 생각하는 것이 직선보다는 곡선에 가까워진다.

 

‘꾀주머니’로 불리는 장량(張良)의 경우가 이를 보여준다. 한고조 유방의 책사(策士)로 이름이 높은 장량도 처음에는 직선적인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장량은 협객을 자처하며 힘으로 세상을 뒤집으려다가 실패한 뒤 발상을 전환해 지혜의 인물로 변신을 한다. <사기> 유후세가(留侯世家)는 그 변신의 과정을 신비로운 빛깔로 그리고 있다. 장량의 이야기를 통해 곡선적 사고가 어떤 것인지를 잠시 더듬어보자.

 

유후 장량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재상을 지낸 한(韓)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자(字)가 자방(子房)이어서 ‘장자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나라가 진시황의 진나라에게 멸망당할 즈음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명문가의 자제로서 전도양양하던 장량이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무렵 아우가 죽자 그는 장례도 치르지 않고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한 거사에 돌입했다. 그의 집안은 종이 삼백 명이나 될 정도로 부유했는데 그는 모든 가산을 털어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한 자금을 만들었다.

마침 진시황이 동방을 순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량은 현자로 알려진 창해군(滄海君)을 찾아가 속셈을 털어놨다.

“시황제를 죽여 한나라의 원수를 갚아야겠습니다. 힘이 세고 담이 큰 장사를 소개해 주십시오.”

창해군이 역사(力士)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는데, 바윗돌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노는 장사였다. 장량은 역사를 자객으로 고용한 뒤 대장간에 가서 무게가 120근이나 나가는 철퇴를 만들었다. 그리고 박랑사(博浪沙) 계곡으로 가서 진시황 일행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진시황의 순행단이 나타났는데 아뿔싸, 황제의 수레가 5대나 되었다.

“모 아니면 도다!”

숲속에 숨어있던 장량과 역사는 그 중 하나를 찍어 철퇴로 내리쳤다. 그러나 박살이 난 수레는 진시황이 아니라 시종이 타고 있던 것이었다. 기세등등했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장량과 역사는 줄행랑을 쳤다. 격노한 진시황은 방방곡곡을 샅샅이 뒤져 두 사람을 붙잡도록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렸다. 장량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변장을 한 뒤 강소성의 하비(下邳)라는 곳에서 숨어 살았다.

 

기약 없이 피신 생활을 하던 장량에게 인생의 변곡점이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다리 위를 지나던 그는 초라한 행색의 노인을 만나게 됐다. 그 노인은 대뜸 장량이 보는 앞에서 신고 있던 짚신을 벗어 다리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말했다.

“이봐, 젊은이!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내 짚신 좀 주워다 주게나!”

장량은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가 싶어 일순간 화가 났다. 하지만 상대가 나이 많은 노인인지라 꾹 참고 짚신을 주워다 줬다. 그런데 노인은 고마워하기는커녕 한 수 더 떴다.

“아, 이 사람아! 짚신을 가져왔으면 발에다 신겨 줘야지!”

장량은 어이가 없었으나 이왕에 참은 것 끝까지 참자며 무릎을 꿇고는 노인의 발에 신을 신겨 주었다. 짚신을 신은 노인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대로 휙 가버렸다. 장량은 뭐에 홀렸나 싶어 노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얼마를 가던 노인이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보아하니 쓸 만한 젊은이로군. 닷새 뒤 새벽에 이 다리로 나와 봐!”

장량은 얼떨결에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닷새 뒤 새벽에 장량이 다리에 가보니 노인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녀석아! 이제 오면 어떡해? 늙은이를 기다리게 하다니 버르장머리 없는 놈! 닷새 뒤 새벽에 다시 와!”

닷새 뒤 장량은 새벽 첫닭이 울자마자 부리나케 다리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노인은 이번에도 먼저 와서 있다가 노여워하며 말했다.

“또 늦었군! 몹쓸 녀석, 닷새 뒤에 다시 나와!”

다시 닷새가 됐을 때 장량은 아예 한밤중에 일어나서 다리로 갔다.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데 노인이 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나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제 됐어! 그만하면 자기를 이길 수 있겠어.”

그러면서 노인은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장량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무슨 책입니까?”

“가져가서 공부해 봐. 이 책으로 공부하면 왕 노릇하려는 자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거야. 자네는 앞으로 10년 뒤에 그 책의 덕을 보게 될 걸세.”

말을 마치자 노인은 뒤돌아서더니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장량이 그 책을 펼쳐보았더니 그것은 소문으로만 듣던 태공망(太公望) 병법서였다. 예사롭지 않게 여긴 장량은 그 책을 늘 품고 다니면서 밤낮으로 외어 익혔다.

 

장량이 태공망병법을 익힌 지 10년이 되었을 때, 진섭(陳涉)이 군사를 일으키는 등 여기저기서 호걸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장량은 유방을 도와 천하통일에 큰 몫을 했다. 장량이 태공망병법에서 배운 지략을 제시하면 다들 이해하지 못했으나 유방만은 좋게 여겨 필요할 때마다 장량의 계책을 채택했다. 다리 위 노인의 예언대로 ‘왕 노릇 하려는 사람의 스승’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장량은 일찍이 힘으로써 진시황을 죽이려다가 실패했지만, 유방의 책사가 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뤘다. 병법을 익힘으로써 힘에 의존하는 직선적 방식에서 벗어나,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는 계책도 꾸밀 줄 아는 곡선적 사고를 하게 된 까닭이다. 다리 위 노인에게 수모를 받았는데도 끝까지 참아서 신비의 병서를 얻게 된 이야기는 그가 직선적 행동을 자제할 수 있는 그릇이 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장량의 빼어난 지혜를 보여주는 일화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자 휘하 장수와 신하들에게 그동안의 공로를 따져 상을 내렸다. 그런데 공신들이 너무 많아 그중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20여 명 외에는 더 이상 봉록을 정하지 못하고 차일피일하고 있었다. 논공행상을 기대하고 김칫국부터 잔뜩 마셨던 장수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어느 날 한고조 유방이 여러 장수들이 궁궐의 뜰에 앉아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장량에게 물었다.

“저들이 대체 뭘 수군거리고 있는 거요?”

“아직 모르십니까? 저들은 모반을 꾀하고 있는 중입니다.”

“뭐라고? 모반을? 이제 겨우 천하가 안정됐는데 무슨 까닭으로?”

“폐하께서는 천자가 되신 이래 아주 친한 신하 20여 명에게만 봉지를 내려주었습니다. 남은 신하들 중에는 평소 폐하께 미움을 받았던 자들이 많습니다. 아직까지 상을 받지 못했다면 이제 벌 받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할 게 뻔합니다. 천하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저들 모두에게 봉지를 내려줄 수는 없습니다. 봉지를 받지 못한 자들은 어차피 벌 받아 죽느니 모반이라도 꾸며보자며 저렇게 웅성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허어,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

“뭐 좋은 수가 있단 말이오?”

유방이 귀를 쫑긋 세우자 장량이 말했다.

“폐하께서 평소 가장 싫어했던 자가 누구입니까? 그가 폐하께 찍혔다는 것을 여러 신하들도 다 아는 사람 말입니다.”

“음, 옹치(雍齒)가 있지. 그자는 옛날부터 나와 원한이 있소. 진즉에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그동안의 공이 많기에 참고 있는 중이오.”

“그렇다면 우선 옹치에게 큰 상을 내리십시오.”

“뭐라고? 내가 이를 갈고 있는 자인데?”

“그러기에 상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가장 미워하던 옹치가 봉지를 받았다고 소문이 나면 다른 신하들도 상을 기대하여 저절로 조용해질 것입니다.”

한고조 유방은 장량의 계략대로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술자리를 베푼 뒤 옹치를 십방후(什方侯)에 봉했다. 그리고 승상을 독촉하여 논공행상을 어서 마무리 지으라고 말했다. 옆의 신하들이 그것을 보고 쾌재를 부르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됐다. 폐하께서 원수로 여기는 옹치도 제후가 됐으니 더 이상 근심할 게 없다.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도 다 상을 받게 될 거다.”

장량의 예상대로 그날부터 장수들이 궁궐 뜰에 모여 웅성거리던 모습이 싹 사라졌다.

 

장량은 모반의 기운을 힘으로써가 아니라 꾀로써 한순간에 잠재워 버렸다.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보다 우회함으로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해결해 버린 것이다. 유방은 “군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리를 얻게 한 사람은 장자방뿐이다”라며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앉아서도 멀리 천리 밖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직사 권총이 아니라 곡사포다. 곡선은 때로 직선보다 빠르고 강하다.

 

‘소교’의 고수가 되려면 이제까지 달려온 길을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대가 지나온 행로는 직선인가 곡선인가? 혹시 눈앞의 문제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달려오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제 활을 보고 배워라. 왜 과녁이 멀수록 더 많이 휘는지를.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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