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호빙하(暴虎馮河)=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고, 걸어서 황하를 건너려고 한다. 호기롭게 보여도 무모함은 용기가 아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만용은 패망을 부를 뿐이다. 진정한 힘은 주먹이나 창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다져진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힘은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

 

투력(鬪力)은 프로기사 3단의 별칭으로 싸울 힘을 갖췄다는 뜻이다. 힘이 있어야 험한 승부의 세계를 헤쳐 나갈 수 있다. 숨은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의 세계에서는 힘이 없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힘은 대체 무엇일까. 힘이 센 사람이란 과연 어떤 이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어느 날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인 안회에게 말했다.

“임금에게 등용되면 나아가 일하고, 버림받으면 숨어서 지낼 수 있는 자는 오직 너와 나 뿐일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자로가 은근히 시샘하여 물었다.

“만약 삼군(三軍)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신다면 선생님께서는 누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자로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 무용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난 자다. 당연히 자기를 꼽을 줄 알았던 자로는 스승 공자에게서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맨손으로 범을 잡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려는(포호빙하·暴虎馮河) 자라면 죽어도 후회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무모한 사람과는 함께 가지 않겠다.”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는 것은 무시무시한 힘이다. 하지만 공자는 그렇게 용맹한 자로지만 삼군을 이끌 만한 장수감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만용은 강자의 덕목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힘은 주먹이나 창칼로써 만들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에는 체구는 볼품없어도 힘이 센 강자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안영(晏嬰)이 그런 경우다. 안영은 키가 5척밖에 안 되는 단신에다 생김새도 보잘 것 없었지만 천하가 그를 우러러 보았다. <사기>를 쓴 사마천은 “안자(晏子)가 다시 살아난다면 내 비록 그의 마부가 되어 말채찍을 든다 해도 기뻐할 것이다”라고 밝혔을 정도다. 안영은 조정에서는 충직함으로 군주를 보필하고, 외교무대에서는 뛰어난 언변과 당당함으로 제나라의 위상을 높여 제후국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했다.

한번은 안영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남방의 강국 초나라가 왜소한 체구의 그를 깔보고 모욕을 주기로 작정했다. 안영 일행이 성문에 도착하자 문지기가 대문을 놔두고 작은 쪽문으로 인도했다.

“굳이 큰 문을 열 것 없이 이 정도 문이면 충분히 출입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안영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건 개구멍이 아닌가? 개의 나라에서나 개구멍으로 출입하는 법이다. 사람을 개구멍으로 드나들게 하다니, 초나라는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개의 나라라는 말인가?”

 

안영의 기지와 해학은 촌철살인으로 유명하다. 마지못해 대문을 열어 안영을 맞아들인 초나라 왕이 이번에는 면전에서 그를 조롱했다.

“옛날 탕왕은 키가 9척이나 됐고, 명장인 자상은 힘이 산을 뽑을 만했는데 그대는 닭 한 마리 들 힘도 없어 보이는구려. 제나라에 인물이 없긴 없는 모양이지요?”

안영이 태연히 대꾸했다.

“뭘 모르는 소리를 하십니다. 저울추는 작아도 일천 근을 들 수 있고, 배 젓는 노는 아무리 커도 그저 물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지요.”

그리고 뼈 있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대국에 맞춰 사신을 보내는 관행이 있습니다.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고,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보내는데 신은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사람이라 초나라에 오게 됐습니다.”

 

한 방 먹은 초나라 왕이 다시 모욕을 주려 일을 꾸몄다. 연회가 시작되고 술이 몇 순배 도는데 뜰이 시끄러워지며 죄수 한 사람이 끌려왔다. 도둑질하다 잡힌 자인데 알고 보니 제나라 출신이라는 것이다. 초나라 왕이 비웃는 눈으로 안영을 보며 말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저렇게 도둑질을 잘 하는 모양이지요?”

안영이 부드러운 어조로 받아쳤다.

“제가 듣기로 귤이 강을 건너 옮겨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고 합니다. 제나라 사람들은 원래 순박하고 착한 데 초나라에 오더니 도둑으로 변했습니다. 초나라 풍토가 원래 그런 모양이지요?”

 

여기서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안영은 의기양양, 양두구육, 추기급인 등 수많은 고사성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그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작은 거인’이었다. 체구는 비록 작았지만 담대한 안영은 권력자의 칼이 목을 겨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제나라 권신인 최저(崔杼)가 임금인 장공(莊公)을 주살했을 때의 일이다. 장공은 사치와 향락에 빠진 군주로 안영 같은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가까이 하다 변을 당했다. 장공이 시해됐다는 소식에 안영이 조문을 가려고 집을 나섰다. 그러자 주위의 가신들이 “가면 반드시 최저의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며 말렸다. 그러자 안영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군주가 죽었는데 신하된 자가 어찌 조문하러 가지 않겠는가. 장공은 어리석은 암군(暗君)이었지만 군주는 군주다. 신하의 칼에 목숨을 잃은 것은 우매한 장공의 잘못이지 나의 잘못이 아니다. 나에게 잘못이 없는데 무엇을 꺼린단 말인가.”

 

장공의 시신이 있는 곳에 도착한 안영은 큰소리로 통곡하며 군주의 죽음을 애도했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와 겁도 없이 호곡하는 안영을 본 최저의 무리들은 이 기회에 그를 죽여 버리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최저는 태연자약한 안영의 기세에 눌리고 말았다. 백성의 신망을 얻고 있는 안영을 죽이면 역풍이 일까 두려워 끝내 칼을 뽑지 못했다. 대신 기회를 보아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실권을 장악한 최저는 경공을 군주로 앉히고 자신은 우상(右相)이 됐다. 그리고 문무백관을 불러 충성서약을 강요했다. 거부하면 바로 죽음이 기다리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새 정권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안영도 불려가 최저가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맹세하게 됐다. 안영은 꼿꼿한 자세로 피가 담긴 잔을 높이 들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원통하구나! 신하가 극악무도하게도 군왕을 시해하다니. 인륜을 짓밟은 포악한 무리들은 모두 제명에 죽지 못하리라!”

일순간 주변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최저가 노발대발하여 금방이라도 찌를 듯이 안영의 목에 칼을 겨눴다. 그러고는 다시 맹세하도록 시켰다. 하지만 안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창칼 앞에서 뜻을 바꾸는 자는 장부가 아니다. 이(利)에 혹하여 의(義)를 저버릴 수는 없다. 차라리 머리가 잘릴지언정 고개를 숙이지는 않으리라!”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는 결연함에 눌려 최저의 칼끝은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뿐이었다. 최저 일당이 이를 가는 가운데 안영은 유유히 사지에서 빠져나왔다. 안영이 수레에 오르자 측근들은 누가 뒤쫓아 오기 전에 어서 떠나자며 재촉했다. 그러나 안영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서둘지 마라. 빨리 간다고 안 죽고, 천천히 간다고 죽는 게 아니다. 어제 사냥터에서 본 사슴이 아무리 빨라도 오늘은 주방장의 도마 위에 있지 않더냐. 죽고 사는 것이 어찌 발걸음에 달려 있겠는가!”

 

이런 것이 진정한 힘이다. 5척 단구의 안영은 제후보다도 당당했고, 권력의 칼보다도 강했다. 어떤 무력도 안영을 이기지 못했으며, 어떤 위협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안영은 비록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는 힘은 없었지만, 창칼을 꺾어 버리는 강함이 있었다.

 

<맹자>에는 “스스로 돌이켜보아 옳지 않다면 누더기를 걸친 사람도 두려워하고, 스스로 돌이켜보아 옳다면 천만 명이 쳐들어와도 대적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혼자서 천만 군대와 맞설 수 있는 당당함은 주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올곧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맹자가 생각하는 용기는 창칼에 있지 않았다. 제나라 선왕(宣王)을 만났을 때의 대화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맹자가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해 설파하자 부국강병의 꿈에 젖어있던 선왕이 딴소리를 했다.

“선생님 말씀은 훌륭합니다만 저는 용맹스러운 것을 더 좋아합니다.”

제선왕은 손자병법의 손빈을 군사(軍師)로 삼아 위나라의 명장 방연을 꺾고 강국의 면모를 다진 군주다. 제선왕이 은근히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자 맹자는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왕께서는 작은 용기를 좋아하지 마십시오.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면서 눈을 부라리며 ‘네가 감히 나를 당해내겠느냐?’라고 한다면 이는 필부의 용기(匹夫之勇)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겨우 한 사람만 대적할 수 있을 뿐입니다. 부디 왕께서는 천하를 상대로 하는 큰 용기를 가지십시오.”

 

‘필부지용’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먹만 믿고 날뛰는 소인배들의 용기를 가리킨다. 힘이 산을 뽑을 만하고, 기세가 온 세상을 덮을 만하다고 했던 천하장사 항우가 그런 경우다. 항우가 한 번 노해서 호통을 치면 천 명이 벌벌 떨 정도였지만 속이 좁아 결국 유방에게 지고 만다. 맹자는 한 번 진노하면 천하의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게 큰 용기라고 이른다. 천하의 대권을 쥐는 것은 혈기와 완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법이다.

 

바둑도 인생도 반복해서 훈련하다 보면 힘이 붙는다. 하지만 이때 우쭐거리는 것은 아직 하수라는 증거다. 진정한 힘은 주먹이나 창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찢어 죽이고, 맨발로 황하를 건넌다고 해서 삼군을 지휘할 용사는 아니다. 겉으로 강해 보인다고 진짜 강한 게 아니고, 약해 보인다고 진짜 약한 것도 아니다. 흥망성패를 좌우하는 진짜 힘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내면으로부터 솟아나는 힘은 외부의 어떤 힘보다도 강하다. ‘싸울 힘이 붙었다’는 바둑의 ‘투력’도 마찬가지다. ‘투력’에 이른 고수는 호기롭게 칼을 뽑아 휘두르는 것보다 오히려 참고 칼을 거두는 것을 힘으로 삼는다.

 

그대는 무엇을 힘으로 삼고 있는가. 하수는 겉으로 드러난 것들을 자랑하지만, 고수는 자기 안의 것을 힘으로 삼는다. 천만인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힘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나온다. 눈에 보이는 근육, 요즘으로 치면 재력이나 배경, 외모, 스펙 등등은 굉장해 보여도 의지할 것이 못된다. 상대의 길고 화려한 스펙이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면 그대는 이제 비로소 싸울 힘을 갖춘 ‘투력’의 고수라고 할 수 있다.

 

<필자 소개>

김태관은 신문기자로 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책 읽고 글 쓰다가 가끔 산책을 하며 또 다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 편집부장과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지 편집국장 등이 그가 지나온 이정표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그는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고전의 숲을 헤매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것도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에서 뒷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 장자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는 <곁에 두고 읽는 장자>, 한비자를 통해 세상살이를 엿본 <왜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바둑으로 인간수업을 풀어본 <고수>, 그리스 신화를 쉽게 풀어 쓴 <곁에 두고 읽는 그리스 신화>,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과 <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수업>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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