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은행나무 한 그루면 정원엔 가을이 가득찬다(경북궁의 은행나무).

가을정원에는 편안함과 휴식이 있다. 봄과 여름 내내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였던 꽃들이 가을엔 열매를 맺으면서 서서히 휴식의 계절로 들어서고 있다.

구절초, 쑥부쟁이, 감국, 용담처럼 가을에 꽃을 피우는 야생화도 아름답지만 사실 가을정원의 주인공은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잎들과 자신의 후대를 위해 성공적으로 탐스럽게 맺은 아름다운 열매들이다.

엽록소에 가려져 있던 안토시아닌 색소체가 나타나는 덕분에 우린 가을의 아름다움을 즐긴다.

가을에 드는 단풍의 정체는 여름의 녹색 잎에 들어있는 엽록소 색소체처럼 안토시아닌(붉은)이나 카로티노이드(노랑)라고 하는 색소체로써 엽록소 안쪽에 존재해 있던 것들이 기온하강과 함께 엽록소 활동이 소실되면서 겉으로 발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가을은 대부분 식물들에게는 휴식의 시작이며, 우리 사람들에게도 편안하고 달콤한 휴식과 함께 감성을 충만시키는 계절이기도 하다.

올해 추위가 예년보다 빨리 와 가을이 짧아질 것 같아 그새 안타깝지만 그나마 가을비가 충분히 내려 올 단풍잎은 그런대로 곱게 물들 것 같다. 정원의 꽃들이 봄부터 여름에 걸쳐 피는 것은 우리 사람들에겐 아름다움과 향기를 주지만 사실 꽃들은 우리에겐 별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방화곤충들의 눈에 들어 꽃가루를 받아 수정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후대를 만들기 위한 일념만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꽃은 어떻게 해서든지 벌이나 나비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 그들을 끌어드려야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힘겹게 수정이 되더라도 충실한 씨앗으로 영글기까지는 또 상당기간이 걸리니 이래저래 가을은 정원의 식물들에게도 힘들고 바쁜 계절이기도 하다. 봄과 여름, 초가을까지 부지런히 자란 식물들은 가을엔 서서히 생장을 멈추며 잎들이 번 양분들은 겨울동안 견뎌낼 힘을 위해 뿌리로 보내진다. 우리 인생의 가을은 언제일까? 일주일로 보면 주말이, 한 달이나 일 년으로 보면 빨간 글자가 새겨진 휴일들이, 인생 전체로 보면 은퇴한 후의 여유로운 삶들이 아닐까 싶다.

아직 본격적인 단풍은 이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가을의 꿀같은 휴식을 가을의 단풍과 함께 즐긴다.

가을정원을 지켜주는 식물들

봄 정원을 지켜주는 것은 생명감 넘치는 꽃들이라면 여름정원을 빛내는 것은 녹음과 식물들의 놀라운 생장 모습이다. 그렇다면 가을정원을 지켜주는 식물들을 헤아려보자. 소나무나 주목처럼 상록성인 것들도 많지만 이들은 제외하고 낙엽성인 것들만 추려본다. 먼저 정원의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 잎이 단풍들거나 열매가 아름다운 것은 벚나무, 다양한 단풍나무들, 복자기, 느티나무, 은행나무, 마가목, 산딸나무, 튜립나무(백합나무), 팽나무, 대왕참나무, 감태나무 등과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같은 유실수도 들 수 있다.

정원의 디테일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들은 소교목이나 관목들로써 피라칸사스(피라칸다), 낙상홍, 꽃사과, 당매자나무, 말채나무, 남천, 좀작살나무, 히페리쿰, 화살나무 등으로 빨갛고 노란 잎과 열매들이 제몫을 다한다. 물론 가을정원의 감초로 초본류도 빼놓을 수 없다. 가을까지 피는 매리골드나 해바라기, 샐비어, 코스모스, 맨드라미, 백일홍 같은 일년초도 있지만 야생화도 많다. 몸체가 좀 큰 수크령과 억새(요즘 핑크뮬리가 유행), 다양한 쑥부쟁이와 개미취, 구절초, 해국, 감국이나 산국 등 국화과 식구들과 용담도 빼놓을 수 없는 가을정원의 보배들이다.   

 

<필자 약력>

- (사)정원문화포럼 회장(2014~)

- 농식품부, 산림청, 서울시, 경기도 꽃 및 정원분야 자문위원(2014~)

- 꽃과 정원교실 ‘꽃담아카데미’ 개원 운영(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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