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일왕이 지난 2016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을 방문해 한국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일본 우익들의 성지로 불리는 야스쿠니(靖國) 신사의 최고책임자가 갑작스레 사임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현지 언론에 따르면 사임 이유가 아키히토 일왕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11일 일본 야스쿠니 신사는 이날 성명을 내고 “코호리 쿠니오 수석 궁사가 회의 중 부적절한 언사를 사용한 사실이 밝혀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고 밝혔다. 코호리 궁사는 지난 3월 제12대 수석 궁사로 취임한 야스쿠니 신사의 최고책임자로 불과 재임 7개월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야스쿠니 신사가 언급한 “부적절한 언사”는 현 아키히토 일왕에 대한 비난을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주간지 ‘주간포스트’에 따르면, 지난 6월 코호리 궁사는 직접 주재한 내부 회의에서 “각하가 열심히 (태평양전쟁 전몰자를 위한) 위령의 여행을 가면 갈수록 야스쿠니 신사는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며 “지금 각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코호리 궁사의 비난은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 부부에게도 향했다. 코호리 궁사는 “만약 남은 재임 기간 중 결국 한 번도 참배를 오지 않으면 지금 왕세자가 즉위 후 참배를 할 수 있겠나? 새 왕후는 신사나 신도를 아주 싫어하는데 과연 오겠나?”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 아키히토 일왕, "일본은 침략 역사 기억해야"

왕실에 대한 경외심이 강한 일본 사회에서 야스쿠니 신사의 최고책임자가 일왕을 직접적으로 비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코호리 궁사가 아키히토 일왕 및 왕세자부부가 야스쿠니에 참배를 오지 않는다며 언성을 높인 것은, 우편향된 일본 정치계와 정반대인 왕실의 정치적 성향과 관련돼있다.

2차대전과 관련해 전쟁 책임이 있는 아버지 히로히토 일왕과 달리, 아키히토 일왕은 일본의 대표적인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즉위 이후 식민지배 피해국들에 대한 사과와 반전의 신념을 지속적으로 밝혀왔다. 지난 1998년에는 방일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께 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다. 그것에 대한 깊은 슬픔은 항상 본인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며 한일 관계가 역사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는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 역사교육에 대한 우려를 반복해서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 2009년에는 일본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라며 침략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후세에게 전달해야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11년 생일에는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 우경화된 아베 내각과 평화헌법 두고 갈등

이 때문에 아키히토 일왕이 평화헌법 개정 등 우편향 정책을 펴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계와 대립하고 있다는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 내각 출범 이후 지속적으로 평화헌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을 해 아베 총리를 불편하게 만든 바 있다. 지난 2015년 신년 인사회에서는 아베 총리를 만나 “올해는 종전 7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인 해”라며 “이 기회에 만주사변으로부터 비롯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서 앞으로 일본 본연의 자세를 생각해 가는 것이 현재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돌직구’ 발언을 던지기도 했다.

또한 코호쿠 궁사가 불만을 토로했던 아키히토 일왕의 ‘위령의 여행’도 자위대의 해외파견을 노리고 있는 아베 총리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종전 70주년인 지난 2015년 4월 아베 총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미일간의 전투가 벌어졌던 남태평양 팔라우 방문을 강행하며 마찰을 빚은 바 있다. 콘도 다이스케 ‘주간현대’ 부편집장은 2015년 월간중앙에 기고한 글에서 아베 총리가 종전 70주년 기념 담화에서 전쟁책임 관련 부분을 축소하려 하자 아키히토 일왕이 담화내용을 수정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 우경화의 강력한 제동장치 역할을 해온 아키히토 일왕인 만큼 일본 우익의 성지인 야스쿠니 신사에는 지난 1989년 즉위한 이래 단 한 번도 참배를 한 적이 없다. 아버지인 히로히토 전 일왕도 1978년 A급 전범들의 위패가 합사되자 야스쿠니 신사에 발길을 끊었다. 심지어 아베 총리조차 지난 2013년 참배를 간 이후 정치적 부담 때문에 4년째 대리 참배를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코호리 궁사가 왕실이 야스쿠니 신사를 무시한다며 불만을 쏟아낸 것도 최근 불거진 문제라기 보다는 일본 왕실과 정치계의 오랜 대립에서 나온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일왕 비난 논란을 일으킨 코호리 궁사는 직접 궁내청을 방문해 사과하고 사임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코호리 궁사의 후임은 이달 말 회의에서 선출될 예정이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