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삶의 무게가 천근만근으로 우리네 삶을 옥죄어올 때 이보다 더 큰 위로를 던지는 노래가 있을까? '레게음악의 전도사' 밥 말리(Bob Marley)의 노래 'No Woman, No Cry'(안돼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는 지금 처한 상황이 최악이라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더라도 절대로 눈물 흘리지 말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며 위로한다. 그렇다면 이 노래속의 그녀는 과연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말리의 아내 리타(Rita)일까? 가사를 잘 살펴보면 분명 사랑하는 배우자나 연인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No Woman, No Cry'의 가사에는 밥 말리가 성장기를 보낸 자메이카의 트렌치타운(Trenchtown) 빈민가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진다. 오갈 데 없이 아무 데서나 잠을 자며 무료급식소(soup kitchen)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처지이지만, 이 가난한 흑인 청년은 결코 백인 압제자들의 힘에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나의 유일한 운반수단은 두 발뿐. 그러니 계속 밀고 나가야지요.”(My feet is my only carriage. So I've got to push on through.)

'Observing the hypocrites'에서 'hypocrites'는 흑인으로서의 자존감을 망각한 채 압제자들에게 붙어먹는 '변절자', '배신자'들을 뜻한다. 말리는 이 가사를 통해 성공을 위해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는 이른바 '엉클 톰'(Uncle Tom)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Good friends we have had. Oh good friends we've lost along the way.”(우리가 만났던 좋은 친구들. 그리고 삶의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좋은 친구들)은 자유를 위한 투쟁에 몸담았던,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중한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투사들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비록 이 숭고한 투사들의 희생으로 “빛나는 내일이 온다 하더라도, 결코 과거를 잊어선 소망이 없다.”고 말리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여인에게 울지 말라며 위로한다.

이렇게 가사를 다 살펴보고 나면 'No Woman, No Cry'에서 말리가 얘기하는 여인이 누구인지 명확해진다. 그녀는 바로 62년까지 영국 식민지배하에 시달렸던 그의 고국 자메이카이며 국민들이다. 더 나아가 말리가 꿈꾸었던 흑인들의 '약속의 땅' 아프리카를 뜻한다. 말리는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흑인들이 언젠가는 고향인 아프리카에 함께 모여 행복한 세상을 건설하리라는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 신봉자였다.

레게를 이해하는데 있어 스카 리듬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라스타파리아니즘이다. 1920년대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에 의해 시작된 이 신앙운동은 백인의 압제에 시달리는 세상을 구약성서의 바빌론으로 규정하고, 이집트의 황제 하일리 셀라시 1세(Haile Selassie I)를 아프리카, 특히 에티오피아로 자메이카 흑인들을 인도할 메시아(Messiah)로 믿었다. 라스타파리안들에게 구약성서의 약속의 땅 시온은 아프리카였다.

하지만 셀라시 황제가 다스리는 기간 동안 에티오피아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고, 결국 쿠데타로 인해 그는 권자에서 쫓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어찌됐든 셀라시의 죽음으로 라스타파리아니즘은 신앙으로서의 기능이 크게 위축됐지만, 여전히 카리브해안 지역 흑인들, 특히 레게 뮤지션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깊은 명상을 위해 마리화나를 사용하고, 레게머리(드레들락, dreadlock)를 고수한다.

가난했던 1950년대 말리에겐 빈센트 포드(Vincent Ford)란 친구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당뇨가 심했던 그는 두 다리를 다 잘라냈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낼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 그는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며 수많은 가난한 흑인들을 굶어죽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가사내용에서 볼 수 있듯 말리는 암울했던 시절 포드와 세상이야기도 나누었고, 함께 음식을 먹기도 했다.

성공한 말리는 그 시절의 우정을 잊지 않았다. 지난 1974년 앨범 < Natty Dread >를 만들 때 'No woman, no cry'를 비롯한 여러 곡의 작사/작곡자로 자신 대신 포드의 이름을 올렸다. 몸이 불편한, 하지만 마음씨가 너무도 고운 친구에게 재정적 보탬이 되기 위한 보은이었다. 이 노래의 가사가 말리와 포드가 자주 나누곤 했던 대화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포드에게도 창작에 관한 약간의 보탬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No woman, no cry'는 < Natty Dread >에 수록된 스튜디오 버전보다 이듬해 라이브 앨범 < Live! >에서의 라이브 버전(말리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후 발매된 베스트 앨범 < Legend >에도 이 라이브 버전이 수록되었다)이 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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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woman, no cry (repeat 4 times) 

안돼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4번 반복) 

I remember when we used to sit 
In the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 
Oba, observing the hypocrites 
As they would mingle with the good people we meet 
Good friends we have had, oh good friends we've lost along the way 
In this bright future you can't forget your past 
So dry your tears. 

난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가 트렌치타운의 빈민가 공터에 앉아
위선적인 자들이
우리가 만난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던 모습을
우리가 만났던 좋은 친구들. 그리고 삶의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좋은 친구들
이 밝은 장래에 결코 과거를 잊어선 아니 됩니다
자 이제 눈물을 닦아요.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Little darling, don't shed no tears 
No woman, no cry 

안돼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안돼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작은 그대여, 눈물을 흘리지 말아요
안돼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I remember when we used to sit 
In the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 
And then Georgie would make the fire light 
Log wood burning through the night 
Then we would cook corn meal porridge 
Of which I'll share with you 

난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가 트렌치타운의 빈민가 공터에 앉았던 때를
조지가 모닥불을 환히 피우고
커다란 나무 조각은 밤새 타올랐어요
그리고 우린 옥수수가루 죽을 만들었지요
당신과 내가 함께 나누어 먹을 그 옥수수가루 죽을

My feet is my only carriage 
So I've got to push on through 
But while I'm gone

나의 유일한 운반수단은 두 발뿐
그러니 계속 밀고 나가야지요
하지만 내가 없을 때에도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repeat 8 times)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8번 반복)

So, no woman, no cry 
No, no woman, no woman, no cry 
Oh, little darling, don't shed no tears 
No woman, no cry 

안돼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안돼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오, 작은 그대여, 눈물을 흘리지 말아요
안돼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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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woman, no cry.”를 두고 지금까지 해석이 분분했다. 그 중 가장 우스꽝스러운 번역은 “여자가 없어도 울지 말아요.”였다. 이 문장의 올바른 문법적 표기는 “No, woman, do not cry.”이다. 자메이카인들은 자주 'do not'(don't)을 줄여서 'no', 혹은 'nuh'라고 쓴다. 말리는 아무리 빈민가의 삶이 애달프다 해도 미래는 희망적이니, “여인(자메이카)이여 울지 말아요.”란 위로의 말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Don't shed no tears.”에서 'to shed tears'는 '울다'라는 뜻의 'to cry'와 비슷한 의미인데, 정확히는 '눈물을 흘리다'가 된다. '쉐드 shed'는 눈물뿐만 아니라 피나 땀을 흘리는 경우에도, 그리고 '버리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예를 들어보자.
1. The soldiers shed a lot of blood on the battlefield.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
2. Many freedom fighter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shed blood, sweat and tears for independence of our nation.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자유 투사들이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3. She's shed 30 pounds since she gave birth to her first child. (첫 아이를 낳은 후 지금까지 그녀는 30 파운드를 감량했다.)

한편 'Shed'가 명사로 쓰일 때는 주로 '물건 등을 쌓아두는 장소, 혹은 창고' 등을 뜻한다. 노래 제목만큼이나 잘못 번역되는 것이 'in the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이다. 여기서 'government yard'는 '어느 정부 기관의 뜰이나 마당'이 아니라 1950년대 말리가 살았던 '빈민가 공영주택의 공터'(public housing) 정도가 되겠다. 미국에서는 이런 빈민가를 'slum', 혹은 'ghetto', 또는 'project'라고 흔히들 말한다.

“Observing the hypocrites”에서 'hypocrite'는 위선자이다. '위선'은 'hypocrisy'이다. 형용사형인 '위선적인'은 'hypocritical'이다. 'Two-faced'나 'double-faced'도 모두 '위선적인'이란 뜻이다. 누군가에게 “You're a hypocrite.”, 혹은 “You're such a hypocrite.”이라고 말하는 건 매우 심한 욕이다.

“In this bright future, you can't forget your past.”(이 위대한 미래에 과거를 잊어선 안 된다.)는 말만큼이나 멋진 말이 바로 “My feet is my only carriage. So I've got to push on through.”(나의 유일한 운반수단은 두 발뿐. 그러니 계속 밀고 나가야지요.)이다.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에 절망하지 않고 계속 꿋꿋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다. 가난하지만 꿈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용기를 주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my feet is my only carriage.”는 올바르게 표기된 문장이 아니다. '발'을 뜻하는 'Feet'은 'foot'의 복수형이기 때문에 'is' 대신 'are'를 써서 “My feet are my only carriage.”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Push on through'는 '...를 헤치고 계속 나아가다'는 뜻이다.

 

<필자 약력>

동서대 임권택 영화영상예술대학 교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각본

방송 <접속! 무비월드 SBS>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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