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 18번, 푸가 연주입니다. 바흐의 푸가가 가진 다양한 정서 중 광기와 음울함을 잘 드러내는 곡이라 여겨집니다. 평균율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 칼럼에 다룬 적 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여리고 밝은 풍의 곡이라도 바흐의 음악이 염세적 영화에 주되게 삽입되는 이유는 그 음악의 객관성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푸가는 모든 '객관적' 음악의 최고봉에 있으며, 철저하게 감정과 몇 걸음의 거리를 유지하던 바흐와 바로크 음악의 특성은, 곧 같은 곡을 통해서도 극단적으로 다양한 감정을 연주자의 해석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특히 성스럽고 경건하며, 극단적으로 음울하고 도취적인 바흐의 푸가는 다양한 영화에서 극적인 씬들을 지배하곤 했습니다.

서양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생전 무명에 가까운 음악가였고, 사망 후에는 음악 애호가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갔습니다. 오히려 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과 요한 크리스찬이 18세기 유럽음악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걸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버지 바흐는 도리어 당대 최고 작곡가들 사이에서는 전설로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바흐가 '서양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된 것은 펠릭스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을 복원하여 무대에 올린 순간부터였습니다. 바흐와 마찬가지로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던(그러나 바흐는 말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전해집니다.) 멘델스존은 사장되었던 마태수난곡의 원본을 드라마틱 혹은 우연하게 발견하게 되고, 지인들의 걱정 어린 만류에도 불구, 작품의 가치를 인지한 그는 흥행에 있어 매우 비관적인 마태수난곡으로 대규모 연주회를 엽니다. 연주회 전 그가 남긴 '한 희극인(동료를 지칭)과 유대인 청년(자신을 지칭)이 지구상 가장 위대한 종교음악을 소생시킬 사명을 짊어졌도다'는 발언은 지금까지도 회자됩니다. 1829년 3월 11일 마태수난곡은 그렇게 역사의 전면에 찬연히 부활하게 되고, 바흐는 사망 한 세기 후 극찬 세례와 함께 '서양음악의 아버지'란 영광을 헌사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극단적 시각이 존재합니다. 명문가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은 7세 때 개신교로 개종하였습니다. 당시 독일 사회에서 유대인에게 있어 개신교 개종은 때로 유럽 공동체에 수용되기 위한 승차권이었고, 그가 마태수난곡을 발굴해 지휘한 것은 유럽 상류사회로 가기 위한 일종의 중요 의례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산업혁명 이후 권력을 쟁취한 개신교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문화 권력을 상징할 아이콘을 간절히 찾던 중 독실한 개신교도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추대했으며, 바흐의 말년 가톨릭 개종이 유난히 알려지지 않은 것은 개신교 제국주의 세력의 입김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이 비약적으로 넘어가게 되면, 이데올로기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서구 제국주의와 완전히 동일시하는 그리스도교-제국주의-클래식-이성주의 절대 배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물론 클래식 음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맨 꼭데기에 군림하는 최고급의 음악은 아니며, 정서에 마냥 순화 작용을 하는 음악은 더더욱 아닙니다. 클래식은 재즈와 함께 인류의 음악 유산 중 가장 깊은 '깊이'를 가지고 있고, 정서적인 풍성함을 곳곳에 담고 있을 뿐입니다. 클래식은 인간의 극단적 광기와 폭력성을 담기도 하고, 한없는 경건함을 담기도 합니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는 살인 때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정서를 안정시켰으며, 동시에 살인을 위한 일종의 의식을 치러냈습니다.

그저 클래식 음악의 가장 큰 본질이며 특징은 '사유에 대한 추구'가 아닐까 합니다. 클래식은 어느 음악 장르보다 역사와 철학을 그 깊이에 담고 있고, 이성과 감성, 사유를 강하게 추구하고 있습니다. 클래식이 진정 뛰어난 음악이라면 그것은 단지 그러한 점들 때문일 것이고, 동시에 그러한 점들은 물론 클래식을 충분히 가치로운 음악으로, 앞으로도 그러할 음악으로 만들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필자 약력>

- 개인 소극장콘서트 <마음 연주회> 205회 (2018.03.17)

- 건국대병원 <정오의 음악회> 고정 연주 (2010.03 ~)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